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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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반 고흐의 노란 방
1888년 9월 15일, 반 고흐는 살고 있던 집 옆에 있는 ‘노란 방(1, Av. de Stalingrad, 13200 Arles)’에 자리 잡는다. 그는 이곳을 전위적인 화가들이 모여 함께 그림을 그리는 아틀리에로 만들고 싶었다. 이 집은 1944년 폭격을 당하여 이제는 볼 수 없지만, 대신 반 고흐가 그린 〈노란 방〉으로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존재하게 되었다.
그는 고갱이 아를로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10월 처음으로 〈노란 방〉(72×92cm)을 그렸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 그림은 견고하고 소박한 침대와 의자, 방석이 깔린 책상이 평온과 질서, 평화의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벽에 걸려 있는 초상화 속 인물은 으젠 보슈와 폴 으젠 밀리에다. 론강에 홍수가 나서 이 그림이 훼손되자 테오는 형에게 복원되기를 기다리면서 같은 작품을 한 장 그려달라고 부탁한다.
반 고흐의 <노란 방>
반 고흐는 두 번째 〈노란 방〉(72×92cm,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을 그리는데, 굳이 원래의 작품과 똑같이 그리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두 번째 버전에서는 으젠 보슈와 폴 으젠 밀리에의 초상화 대신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 남성과 여성의 초상화가 보인다.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반 고흐는 앞의 두 버전보다 작은(57×74cm) 세 번째 버전을 그려 여동생에게 선물한다. 원래 일본인 소유였던 이 세 번째 〈노란 방〉은 1959년 프랑스와 일본 간에 체결된 평화 협정에 따라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그림에서는 으젠 보슈의 초상화가 반 고흐 자신의 수염 깎은 자화상으로 바뀌었고, 오른편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림 속 작품 일부는 사라져서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아를에는 반 고흐가 이젤을 세웠던 장소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
1888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반 고흐는 아를 시내에 있는 카페의 밤 풍경을 그린다. 〈밤 카페〉는 라마르틴 광장에 있었던 역전 카페를 그린 것인데, 이 카페는 아쉽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반 고흐의<아를의 밤의 까페>
반면에 시내 한가운데의 포룸 광장에 가면 노란색으로 칠해진 반 고흐 카페가 단번에 시선을 잡아끈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소재인 이 카페(그 당시에는 ‘테라스’라고 불렸으나 지금은 ‘반 고흐 카페’라고 불린다)는 아직 남아 있어서 아를을 찾는 관광 객들의 명소가 되었다.
아를에 있는 반 고흐 까페
반 고흐는 이 작품에 대해 동생 빌헬미나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테라스에서는 꼭 인형처럼 생긴 사람들이 술을 마시고 있어. 커다란 노란색 등이 테라스와 카페 정면, 인도를 환하게 밝혀주고, 심지어는 장밋빛과 보랏빛 색조를 띤 거리의 포도 위에까지 빛을 비추지.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사라져 가는 길거리 양편에 서 있는 집들의 박공은 짙은 푸른색이나 보라색을 띠고 있어.
나무는 초록색이고…. 자, 이렇게 해서 아름다운 푸른색과 보라색, 초록색뿐 검은색은 없는 그림이 탄생했단다. 그리고 이 주변 풍경 속에서 환히 밝혀진 광장은 연한 유황색과 초록색이 섞인 노란색으로 물들었어. 현장에서 직접 밤 풍경을 그린다는 건 꽤 재미 있는 일이야.”
반 고흐의 <밤의 까페 테라스>
이 작품은 원색인 파랑과 노랑을 사용해서 한층 더 선명해 보인다. 게다가 하늘에 별이 총총한 이 작품은 1년 뒤 생레미드프로방스(Saint-Rémy-de-Provence)에서 그릴 반 고흐의 또 다른 걸작 〈별이 빛나는 밤〉을 예고한다.
반 고흐 다리
반 고흐 카페에서 10분쯤 걸어가면 아를을 휘감아 흐르는 론강이 나타난다. 강가에 앉아 있다 보면 〈별이 총총한 밤〉의 풍경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의 <랑글루아 다리>
그는 아를에 머무르면서 인근의 부크라는 곳까지 이어지는 선박 항해용 운하에 걸쳐진 12개의 도개교 중 하나를 화폭에 담았다. 이 도개교는 그것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랑글루아 다리라고 불렸고, 지금은 흔히 ‘반 고흐 다리’라고 불린다. 프랑스어가 서툴렀던 반 고흐는 랑글루아(Langlois)를 랑글레(l’Anglais, ‘영국 사람’이라는 뜻)로 잘못 알아들어 “영국인 다리, 영국인 다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다리를 주제로 1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운하를 설계한 사람이 네덜란드 기술자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껴서였다고 하고, 실제로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 보내기도 했다.
반 고흐 다리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반 고흐 다리는 원래 반 고흐가 그렸던 그 다리가 아니다. 아를 시내에 있던 진짜 다리는 그 자리에 45m짜리 콘크리트 다리가 건설되면서 없어졌다. 그렇다면 우리가 운하에서 볼 수 있는 반 고흐 다리는 어떤 다리일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앞에서 말한 12개의 도개교 중에 포스쉬르메르라는 곳에 있는 도개교 하나만 남겨놓고 다 파괴해 버렸다. 이 유일하게 남은 이 도개교가 바로 지금의 반 고흐 다리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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