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15) - 생트로페(지난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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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온 18세 소녀의 소설(전 호에서 계속)
세실은 새어머니가 될 수도 있을 엄격하고 도덕적인 안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 레이몽을 전 여자친구 엘자와 다시 결합하게 하려고 한다. 엘자는 레이몽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세실이 시키는 대로 한다. 레이몽이 자기를 속이고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느는 집을 나가 자동차를 타고 파리로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는다. 어쩌면 자살한 것인지도 모른다. 세실은 아버지와 함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이 비극적인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 세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슬픔’이라는 감정뿐이다.
영화 <슬픔이여 안녕>의 한 장면
18세 소녀가 쓴 이 소설은 관습의 틀 속에 끼여 옴짝달싹 못 하던 프랑스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1950년대 많은 젊은 프랑스 여성들은 그들의 본능적인 욕망을 자신의 내부에 억누르고 있었다. 그들에게 《슬픔이여, 안녕》은 마치 거대한 해일 같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상대를 사랑하거나 결혼을 할 거라서가 아니라 그냥 쾌락을 위해서 육체관계를 맺음으로써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산다.
이 작품은 출간되고 나서 몇 달 뒤에 로맹 가리가 《유럽의 교육》으로, 그리고 알베르 카뮈가 《페스트》로 수상했던 ‘비평가상’을 받았다. 또한 1958년 오토 프레민저 감독은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세실(진 시버그가 연기했다)은 독백한다. “그래서 난 여기서 기억의 벽에 둘러싸여 있어. 기억을 멈추려고 해보지만 멈출 수가 없어….”
영화 〈신이… 여자를 창조하셨다〉 포스터
▮ 실존주의의 상징 〈신이… 여자를 창조하셨다〉
1956년 11월 28일, 로제 바딤이 연출하고 브리지트 바르도가 주연을 맡은 영화 〈신이… 여자를 창조하셨다〉가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다.
입양아인 쥘리에트는 생트로페 항구에서 뭇 남성들의 애를 태울 만큼 아름답고 관능적이며 도발적이다. 자유를 갈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고 있다. 그는 작은 선박 수선소를 운영하는 앙투안을 사랑한다. 하지만 앙투안이 자신을 하룻밤 상대로밖에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에게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양부모가 다시 고아원으로 보내버리겠다고 위협하자 쥘리에트는 사랑하지 않는 소심한 남자 미셀과 내키지 않는 결혼을 한다.
앙투안은 미셀과 함께 나이트클럽 사장 에릭을 위해 일하기 시작하고, 미셀과 대립한다. 쥘리에트는 미셀이 마르세유에 다니러 간 사이에 몰래 앙투안의 배에 올라탄다. 하지만 배를 출발시키려는 순간 엔진이 과열되어 배에 불이 붙고 앙투안은 바다로 뛰어들어 쥘리에트를 구한다. 그들은 함께 밤을 보내고 연인이 된다.
미셀이 이 사실을 알게 되자 쥘리에트는 도망친다. 미셀은 쥘리에트를 찾아 나서지만 앙투안이 가로막는다. 두 사람은 격렬한 몸싸움을 벌이고, 미셀은 앙투안을 때려눕힌다.
미셀은 에릭의 나이트클럽에서 미친 듯이 차차차 춤을 추고 있는 쥘리에트를 발견한다. 그는 호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낸다. 에릭은 쥘리에트가 미셀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며 설득하지만 그는 방아쇠를 당기고 그 과정에서 에릭이 가벼운 부상을 입는다. 미셀은 쥘리에트의 뺨을 때린다. 쥘리에트는 아무 말없이 앞으로는 자신의 유일한 남자가 될 미셀의 뒤를 따라간다.
영화 〈신이… 여자를 창조하셨다〉의 한 장면
이 영화가 개봉되자 어떤 사람들은 브리지트 바르도에게 열광하며 단숨에 그의 팬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분노하며 증오심을 표출했다. 영화에서 여성이 남성의 그것과 똑같은 욕망을 표현하고, 육체를 이용하여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결혼한 여성에게 강요된 운명을 거부하고 자유를 쟁취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드가 등장하는 장면 역시 충격을 주어 일부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검열로(프랑스에서는 영화 전체 분량의 4분의 1가량이) 잘려 나갔다.
클로드 샤브롤이나 프랑수아 트뤼포, 장 뤼크 고다르 같은 젊은 누벨바그 영화감독들은 이 작품을 호평했지만, 일반 대중은 이 영화가 처음 프랑스에서 상영되었을 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와 반대로 영국과 독일에서는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다. 이 두 나라에서 거둔 성공에 힘입어 영화는 프랑스에서 다시 상영되었고 대성공을 거두었다(처음 개봉되었을 때는 입장객 수가 17만 명에 불과했지만 재개봉되자 4백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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