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칼럼 분류

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33) -무스티에생트마리, 절벽 위에 조성된 도자기 마을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47b61b066977f7896a68ab4a29e2c6fe_1730152326_8475.png
바농의 독립서점 르 블뢰에


바농 -프랑스 농촌에서 가장 큰 독립서점

염소 치즈로 유명해서 매년 5월 치즈 축제를 벌이는 바농(Banon)에는 놀라운 게 한 가지 있다. 주민 수가 1,000명밖에 안 되는 이 작은 마을에 무려 11만 종의 장서(재고는 18만 9천 권이며, 반품률은 2%에 불과하다)를 갖춘 독립서점 르 블뢰에(Librairie Le Bleuet)의 문이 1년 내내 열려 있다는 것이다. 1990년에 문을 연 이 서점은 프랑스 농촌에 있는 독립서점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이 서점은 2012년에 백만 권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짓고 인터넷 판매망을 구축했다. 그런데 창고 관리에 너무 큰 비용이 들어가고 인터넷 판매도 기대에 미치지 못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르 블뢰에 서점은 여전히 프로방스의 문화적, 경제적 성공 사례로 남아 있다.


무스티에생트마리- 절벽 위에 조성된 도자기 마을

바농 마을을 떠난 자동차는 길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보라색 라벤더밭 사이를 지나 ‘도자기 마을’ 무스티에생트마리(Moustiers-Sainte-Marie)로 향한다.


이 마을은 아두강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흰색 절벽에 패인 협곡의 측면에 마치 ‘천공의 성 라퓨타’처럼 떠 있다. 마을 한가운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을 가진 교회가 있다.


이 교회 위쪽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을 올라가면 노트르담드보부아르 예배당이 나타나고, 여기서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아찔하다.

227m 길이의 쇠사슬이 협곡의 양쪽 기슭을 연결하며, 이 쇠사슬에는 가지가 5개 달린 별이 매달려 있다. 전설에 의하면, 7차 십자군 원정 때 포로로 잡힌 블라카라는 기사가 만일 풀려나면 별을 달겠다고 약속했는데, 풀려나자 이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

관광객들이 작은 광장과 좁은 골목길, 오래된 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을 1년 내내 찾아오는 이유는 이곳에 도자기 가게들이 즐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47b61b066977f7896a68ab4a29e2c6fe_1730152452_6671.jpg
무스티에생트마리 전경


프로방스에서 신석기시대부터 생산되기 시작한 자기는 건물을 지을 때(벽돌이나 기와 등)뿐만 아니라 음식을 보관하는데 (항아리)도 쓰이고 식탁에서도 쓰였다. 1659년에서 1668년 사이에 30명의 도자기 제조인들이 무스티에생트마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 마을이 자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품질 좋은 점토와 물, 화덕에 불을 피울 수 있는 넓은 숲이라는 3박자를 모두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말, 도자기 제조인들은 에나멜을 입히는 기술을 발견하였다. 무스티에생트마리 도자기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먼저 도자기 제조인 가문 출신인 피에르 클레리시가 1687년 처음으로 도자기 공방을 열었다. 그는 오직 청색 단색화를 그린 도자기만 만들었다.


1738년에 조제프 올레리는 여러 가지 색을 배합하여 그로테스크한 그림과 신화적 주제의 그림, 화환 그림으로 도자기를 장식했다.

프라는 제3세대 도자기 제조인으로, 강렬하고 화려한 색깔을 사용하여 정원과 바다 풍경, 꽃 그림으로 도자기를 장식하였다.

그 이후에 출현한 ‘페로 스타일’은 무스티에생트마리의 예술적 도자기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재료가 희귀해지고 영국 도자기가 경쟁에 뛰어들면서 200년 동안 가마에 불이 꺼지지 않았던 무스티에생트마리의 도자기 생산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공방이 하나둘 문을 닫았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피에르 투생 페로의 공방도 결국 1874년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1927년 마르셀 프로방스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도자기 박물관을 설립한 역사학자이자 시인 마르셀 조안논이 다시 가마에 불을 붙이면서 무스티에생트마리의 도자기 산업은 되살아났다.

현재 이 지역에는 11개의 도자기 공방이 있다. 예약하고 찾아가면 도자기 만드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할 수 있다.


루시옹-사무엘 베케트에게 영감을 준 붉은빛

무스티에생트마리를 떠난 자동차는 다시 보라색으로 넘실거리는 라벤더의 파도를 헤치고 서쪽으로 달려간다. 2시간쯤 지났을까, 이번에는 루시옹(Roussillon) 마을에서 쏟아져 내리는 붉은색 파도가 자동차를 향해 밀려온다.


가파른 황갈색 절벽 위에 세워진 이 마을은 지붕도, 건물 정면도, 벽도 파프리카와 오렌지, 복숭아색으로 칠해져 있다. 그리고 마을에서 몇 걸음 안 떨어진 황토 채석장은 온통 핏빛과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다. 이 마을은 마치 화염목처럼 하루 종일 이글이글 타오른다. 해 질 무렵이 되면 소나무 숲의 초록과 하늘의 블루가 이 불길을 잠재우면서 루시옹의 풍경은 완성된다.


47b61b066977f7896a68ab4a29e2c6fe_1730152559_4268.png
루시옹


사무엘 베케트(1906~1989)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레지스탕스 운동을 도왔다는 이유로 경찰에 쫓기자 아내 쉬잔과 함께 루시옹으로 몸을 피했다.


이 마을에서 그는 농업 노동자가 되어 포도를 수확했다. 루시옹 마을이 그를 구원한 것이다. 이 마을은 그에게 영감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그는 모국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글을 쓰기로 하고 부조리극〈고도를 기다리며〉를 프랑스어로 썼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제2막 서두에서 블라디미르는 에스트라공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루시옹에 있는 보넬리 씨네 포도밭에서 포도 따는 일을 했어. 거기는 모든 게 다 붉은색이지.”


메네르브-피카소와 도라 마르

뤼베롱 지역의 높은 언덕에 걸터앉아 있는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은 메네르브(Ménerbes)는 루시옹에서 남서쪽으로 17km 거리에 있다.

이 마을은 폭이 좁고 길어서 높은 절벽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굴러떨어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은 마을을 빙 둘러싼 성벽이다. 이 성벽은 또한 15세기에 쉴 새 없는 구교도들의 공격으로부터 신교도들을 보호해 주었다. 이 마을의 시계탑에서는 뤼베롱 지역은 물론 보클뤼즈의 산들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메네르브에는 피카소의 연인 도라 마르의 집이 남아 있다(58, rue du portail neuf, 84560 Méerbes). 도라 마르는 1935년 말 장 르누아르 감독의 영화〈랑주 씨의 범죄〉에 스틸 사진작가로 일하다가 파리의 되 마고 카페에서 폴 엘뤼아르의 소개로 피카소를 만났다. 두 사람의 관계는 그 이후로 9년 동안 이어졌지만, 피카소는 마야의 어머니인 마리 테레즈 발테르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


47b61b066977f7896a68ab4a29e2c6fe_1730152598_2841.jpg
메네르브 전경


피카소에게 도라 마르는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 그에게 도라 마르는 무엇보다도〈우는 여인〉(1937년, 테이트 모던 미술관)이었다. 그는 피카소에 의해 대상화되고 해체되었다. 피카소는 울고 있는 그를 사랑한 것이었다. 도라 마르의 몸과 마음은 점점 더 피폐해져 갔고, 1940년대 중반 피카소와 결별한 후 심각한 우울증을 앓으면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 여기서 그는 그 당시에는 금지되어 있던 전기 충격 치료를 받았다. 자크 라캉으로부터 정신 분석 치료를 받기도 했다.


정신병원에서 나오자 피카소는 도라 마르에게 메네르브에 집을 사주었고,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았다.


<이재형 작가>


1, 이재형 작가와 함께 하는  "파리구석구석 투어"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