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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 만에 밝혀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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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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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훈 유서대필 사건 무죄 확정-

눈빛이 살아있고, 총명해 보이던 29살의 청년이 53세의 중년이 되었다.
지난 24년 동안 그의 삶은 어땠을까 ? 24년 동안 분신한 동료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누명을 쓰고 산 삶은 어땠을까 ?

지난(2015년) 5월 14일 대법원은 강기훈의 유서 대필 의혹 사건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1991년 봄,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지면서 노태우 정권의 실정과 공권력의 폭력에 항의하는 대학생, 노동자들의 분신이 잇따랐다. 그와중에 김기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이 서강대 옥상에서 분신 자살을 하게 된다. 열흘 뒤인 5월18일 <국민일보> 사회면에 “김기설씨의 유서는 K모씨에 의해 대필되었다’’는 기사가 실리게 된다. 이에 검찰은 전민련 총무부장이던 강기훈을 자살 배후로 지목하고 그가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로 수사에 착수하게 된다.

40시간 동안 잠을 재우지 않았고, 매일같이 반복 질문과 욕설을 하는 등 가혹한 수사가 계속되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필적 감정 결과,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썼다”고 밝혔다. 그해 7월13일 강기훈은 자살방조 혐의로 구속 기소됐고, 이듬해 징역 3년을 확정받았다.

2007년 김기설의 친구가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김기설이 작성한 ‘전대협 노트’와 낙서장을 제출하자, 재조사가 이뤄졌다. 국과수는 다시 감정해 “전대협 노트와 유서의 필적이 같고,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이 다르다”며 과거와는 정반대의 감정 결과를 내놓았다. 진실화해위는 이를 토대로 “유서는 김기설이 쓴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내고 강기훈에 대한 재심을 권고했다. 2012년 10월 대법원은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그리고 뜨거운 공방이 이어진 끝에 14일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려왔다.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파리 독일대사관에서 빼낸 정보서류와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린 유대계 장교 드레퓌스는 법정투쟁 끝에 12년만에 무죄를 확정받았다. 강기훈 사건에서도 ‘필적’이 문제였는데, 그는 드레퓌스의 두배인 24년이 걸려서야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1992년 7월 강기훈은 대전교도소 독방에서 배식구를 통해 받은 대법원 판결문 뭉치를 읽다가 집어던졌다. 3년의 감옥살이를 마친뒤 세상으로 돌아왔을때 어느 누구도 누명쓴 그를 품어주지 않았다.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유서대필 사건의 대법원 판결문으로 자살방조 사건 판례를 공부한다는 말을 듣고는 처참한 심정이었다. 버스에서 강씨를 알아본 노인은 “저런 새끼는 죽어야 한다”고 욕을 했고, 직장을 다니며 업무로 만난 사람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서는 왜 써주신 건가요?”라고 묻기도 했다. 24년만에 진실이 밝혀지고, 그는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 삶과, 암 투병에 지친 육신 앞에 ‘무죄’는 너무 늦은 것 같다.

한겨레는 사설을 통해, ‘’진실은 승리했지만 반성과 사과는 끝내 없었다. 이번 사건에서 검찰과 경찰, 법원 등의 국가기관은 진실을 조작하고 오랫동안 은폐하는데 한몸이었다. 수십년의 세월이 걸려 진실을 밝혀냈지만, 검찰과 법원은 잘못을 인정하는데 인색했다. 24년 동안 한 인간을 병마에 몰아넣을 정도로 고통을 주고 괴롭힌 것을 사과하거나 위로하지도 않았고, 정의의 실현을 지연시킨데 대해서도 반성하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면, 지금의 대법원은 비겁하기 그지없다. 검찰은 이번 사건 말고도 지난 수십년 동안의 숱한 진실 조작과 사건 왜곡에 대해 단 한번도 반성하고 사과한 일이 없다. 이런 검찰은 공익의 대변자도, 신뢰를 받는 온전한 사법기구일 수도 없다. 진실 왜곡에 일조한 대가로 출세를 했다고 한들 역사 앞에 죄인으로 기록되는 것은 면할 수 없다.’’고 했다.


<파리광장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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