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형 작가의 <파리의 연인들> (2) - 빅토르 위고와 쥘리에트 드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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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
1833년 파리.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는 이미 <에르나니>나 <노트르담 드 파리>를 발표한 유명 작가였다. 파리 지앵들은 그를 화제로 삼았고 여자들은 30 대에 접어든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비록 아내 아델은 그에게 충실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편 이름 없는 연극배우인 쥘리에트 드루에(Juliette Drouet 1806-1883)는 캐스팅 되기 위해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있었다. 관객들에게도, 비평가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재능 없는 여배우는 대신 자신의 미모를 무기로 삼았다. 그녀는 조각가 제임스 프 라디에(James Pradier 1790-1852)와 오랫 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하며 그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고 헤어진 뒤 러시아 백작 아나톨 드미도프(Anatole Demidoff 1812-1870)에 게 얹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한 것은 연극이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빅토르 위고의 희곡 <뤼 크레스 보르지아>에서 네그로니 왕녀 역을 준비하고 있었다. 1833년 2월 6일, 배우들이 모여 대본을 읽고 있는 자리에 빅토르 위고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했다. 열흘 뒤, 쥘리에트 드루에는 빅토르 위고의 여자가 되었다.
사랑에 미친 소설가 빅토르 위고는 그들의 첫날밤을 <레미제라블>에 영원히 남겼다. 코제트와 마리우스가 맞는 첫날밤(5권 6부 1장)은 바로 그들의 첫날밤이었다.
“1802년 2월 26일, 나는 태어나 생명을 얻었지요. 그리고 1833년 2월 17일, 나는 다시 태어나 당신의 품에서 행복을 얻었어요. 첫 번째 날에는 오직 생명만을 얻었지만 두 번째 날에는 사랑을 얻은 겁니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생명을 얻는 것 이상이지요.” (빅토르 위고가 쥘리에트 드루에에게 보낸 편지)
쥘리에트 드루에는 빅토르 위고를 진심으로 사랑하면서도 내심 한 가지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즉 연극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빅토르 위고 같은 사람과 교제를 하면 주인공 역을 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빅토르 위고는 그녀가 부유한 러시아 후원자가 제공하는 호화로운 생활을 중단하도록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연극배우의 경력까지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보주 광장에서 멀지 않은 생타나스타즈 거리의 생활하기 불편한 작은 독신자용 아파트에서 살도록 했다. 아니, 그녀를 여기 가두 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쥘리에트 드루에의 초상화
그리고 그녀가 누구도 집에 들이지 말고 자기랑 함께가 아니면 외출도 못하게 했다. 위고는 그녀의 모든 걸 통제했다, 심지어는 그녀에게 온 편지도 자기 앞에서 열어보게 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기꺼이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하루종일 바느질을 하고 집안 살림을 하면서 그를 기다렸다. 그는 그녀가 하루에 두 번씩 자기에게 편지를 쓰도록 했고, 편지를 쓰는 것은 그녀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다.
“오늘 제가 사는 이 사막 같은 집에 이렇 게 일찍 찾아와주시다니,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저의 하루는 꼭 쓰디쓴 약을 억지로 삼키는 것처럼 힘들지만 당신이 절 찾아와주시면 전 꼭 달콤한 설탕을 입속에 집어넣을 때처럼 행복해진답니다.”(쥘리에트 드루에가 빅토르 위고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사실 쥘리에트 드루에의 입장에서 이것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물론 빅토르 위고를 사랑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불평을 늘어놓았다.
“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요. 왜냐하면 내 마음은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거든요. 하지만 내 마음은 조금 씁쓸 합니다.”(쥘리에트 드루에가 1883년에 빅 토르 위고에게 보낸 편지)
쥘리에트 드루에는 이렇게 갇혀 살다시피 살아가고 있었지만 빅토르 위고는 문단의 거물이 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고, 많은 여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아내에게 11년 동안 충실했던 그는 이제 거리낌 없이 여자들을 쫓아다녔다. 그가 바람을 피운 상대는 공개된 것만 해도 소설가 레오니 도네 와 배우 알리스 오지, 쥘리에트의 하녀였던 블랑슈(쥘리에트는 이 사실을 알자 빅토르 위고를 떠났다가... 닷새 뒤에 다시 그의 곁으 로 돌아왔다!) 빅토르 위고의 아내 아델 위고는 그녀에게 분노했다.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1838년 빅 토르 위고는 자신의 희곡 <뤼 블라스>를 무대에 올리면서 쥘리에트 드루에에게 마리아 드 뇌부르그 역할을 주기로 하고 함께 파리 밖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아델 위고는 연극 감독을 찾아가서 만일 쥘리에트 드루에를 출연시키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빅토르 위고는 이 소식을 접했지만 쥘리에트 드루에를 출연시키기 위한 아무 조처도 취하지 않았고, 그녀는 서러운 눈물만 흘려야 했다.
“마리 드 뇌부르그 여왕은 결코 나에 의해서도, 그리고 나를 위해서도 살지 않을 거예요. 전 지금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더 슬프답니다. 마지막 희망을 잃어버리고 나니 정말 힘들어요.”(쥘리에 트 드루에가 1883년에 빅토르 위고에게 보낸 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위고에 대한 그녀의 사랑은 식지 않았다. 한편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존재만으로 그녀의 희생을 보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유명해지면 당신도 행복해할 거요.”(빅토르 위고가 쥘리에트 드루에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세월이 흐르고 함께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점자 돈독해져 갔다. 1846년 쥘리에트는 곧 스무 살이 되는 딸 클레르를 잃었다. 그녀는 절망하여 딸의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대신 빅토르 위고가 장 례식에 참석하여 클레르의 아버지와 함께 운구행렬을 이끌었다.
1851년 12월, 빅토르 위고는 루이-나폴레 옹 보나파르트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공화파의 일원이 되었다. 파리는 큰 혼란에 빠졌다. 바리케이드가 쳐지고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
시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빅토르 위고도 위험에 처했다. 쥘리에트 드루에가 나서서 빅토르 위고의 망명을 준비했다. 가짜 신분증을 만들고 아델 위고에게도 알렸다. 그녀는 영국 영토인 저지 섬에 이어 건지 섬까지 그를 따라갔지만 그와 함께 살지는 않았다. 빅토르 위고는 결국 쥘리에트 드루에가 자신에게 얼마나 헌신적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1870년 파리가 프러시아군에게 포위되어 있 을 때 그는 자기가 언제 어느 때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자식들에게 이렇게 쓴다.
“그녀는 1851년 12월에 내 생명을 구했고나를 위해 망명을 했어. 그녀의 영혼은 결 코 내 영혼을 떠나지 않았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하기 바란다. 그리고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기 바란다. 내가 죽으면 그녀는 나의 미망인이 될 거야.”
그와 쥘리에트 드루에와의 불륜은 마침내 그의 가족 모두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1864 년에 아델 위고는 자신의 라이벌을 성탄절 파티에 초대하기까지 했다! 쥘리에트 드루에는 죽을 때까지 빅토르 위고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는 언제 어느 때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하고 자랑스러워요.”(1883년 1월 1일 쥘리에트 드루에가 빅토르 위고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
그녀는 빅토르 위고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883년 5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이재형 작가>
이재형 작가와 함께하는 2월 "파리 미술관 투어"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와 <프랑스를 걷다>, <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프로방스 여행> 쓴 이재형 작가가 2월 파리 미술관 투어를 진행합니다.
-일시: 2월 16일 일요일
-코스: 오르세 미술관 – 오랑주리 미술관 – 로댕 미술관
-시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요금: 80유로(입장권은 별로 구입), 3인 이상일 경우 진행합니다
-모이는 곳: 추후 공지
-연락처: 카톡 - korearoad26 혹은 전화번호 - 07 81 53 02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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