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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유가족 파리 방문시 피해자 국제회의를 제안한 스테판 직껠, 그는 누구인가?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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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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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일요신문, '그는 희생자들의 로비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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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박 사무총장, 스테판 직껠


지난 5 12일부터 14일 (2016년) 까지 있었던 세월호 유가족과 416 세월호 연대 파리 방문때에 그들을 맞이하며 올해 10월 서울에서 세계 참사 피해자를 위한 국제 회의를 제안했던 프랑스 재난 및 테러 희생자 국가 연합 FENVAC 사무총장인 스테판 직껠 Stéphane Gicquel, 그는 5 13일 금요일 10FENVAC 사무실에서 있었던 세월호 유가족과의 회의에 유경근 집행위원장이 파리에 온 목적을 설명하고 나니, 우리는 그런 것을 의문시 했던건 아니라면서, 왜 이곳에 왔는지 이유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너무 잘알고 있다며 진중한 모습으로 이야기했다. 우연히 그에 대해 검색하다가 프랑스 언론에서 다룬 그의 기사들을 찾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싣는다.

프랑스 일요신문은 2015 21일자 인터넷판에 스테판 직껠, 희생자들의 로비스트-라는 제목의 기사를 싣었다. 샤를리 엡도 테러가 일어나고 난뒤, 1 11일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을 위시해서 테러규탄 전 국민 행진이 있었다. 그날 스테판 직껠은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테러 희생자들 지원을 위해 프랑스 외무부에서 하루 종일 있었다. 스테판 직껠은 샤를리 엡도 테러 이후 희생자들을 돕기 위해 나섰다. 그는 ‘’처음으로 제도적인 장치 중심에 있게 되었다’’ 고 했다.

그의 수첩은 여러 곳의 비극들이 적혀져 있다. 크리스마스 때 에어아시아 비행기가 추락했고, 노먼 아틀란틱호에 화재가 있었다. 이어 1월에 샤를리 엡도 테러가 있었다. 그는 쿠바에서 자동차 사고로 실종된 프랑스인들의 측근들을 만났고, 그 당시 풀려난 인질, 세르지 나자레빅 Serge Lazarevic을 맞이했다. 그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무 것도 희생자들에게 주어지지는 않았다. 순간의 공감을 너머 모든 것은 힘의 관계로 이루어진다’’고 하면서, 스테판 직껠은 스스로 희생자를 위한 로비스트라고 여기고 있다.

온화하고 정중한 모습의 스테판 직껠은 42세로 어떠한 투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대학생 때 미국 텔레콤업제인 AOL을 거짓 광고로 유죄 선고를 받게 했다. 파리법원의 프랑소와 몰랭 François Molins 검사는 그는 강인하고 비타협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강한 핵심 파트너라고 했고, 희생자들이 겪는 문제들은 깊이 인식하고 있다고 했다.

보르도 시앙스 포 Sciences-Po 출신인 스테판 직껠은 5형제 중 막내로 파리에서 장관, 수석판사, 대기업 사장과의 인간 관계를 잘 직조하고 있다.

 

인내를 가르쳐준 활동

9천명이 살고 있는 루데악Loudéac이라는 작은 마을의 아이였던 그는 오늘날 텔레비젼 출연에 익숙하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일요신문에서 그를 다룬다는 제안에 바로 그의 친구인 귀욤 디디에 Guillaume Didier (전 법무부 대변인)에게 전화를 하서는 일요신문에서 내 이야기를 한데, 난 앞에 나타나기 싫어, 호기심으로 바로보는 시선에 노출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한탄했다.

물론 그의 이미지에 거품이 끼게 되면 활동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에어알제리 사고로 남편을 잃은 산드린 트리코는 ‘’사고가 일어나고 두달이 지났다. 언제든지 그에게 전화를 하면 바로 답한다’’고 했다. 리오-파리 선박 사고로 아들을 잃은 다니엘 라미는 ‘’그는 항상 법률적인 조언을 주고 있다’’고 한다.


스테판 직껠은 왜 피해자들의 로비스트가 되었나 ?

그가 이야기한다. ‘’2004년 크리스마스 다음 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어요. 형이 타이랜드에서 전화를 했어요: 바다가 범람했어. 소이직(아내)과 아이들을 잃었어,’’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어요. 바로 티비를 켰고, 병원과 대사관에 연락을 취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필요가 없었어요. 재난, 당신들은 다른 이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할겁니다. 거기에 당신이 관람자이자, 관련자가 되어버리는 것, 이해하기 힘든 초현실이었어요.’’   

엉망인 행정, 형수와 조카들 신원조차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 당시 그에게 가장 상처를 주었던게, 메일에 대사관 직원이 ‘’바다에서 실종된 경우, 시신 수습에 대해 별로 할수 있는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를 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간절히 느꼈다.

당시 그는 큰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지겹기만 했다. 스테판 직껠은 검사를 꿈꾸었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검사 시험에 두번이나 떨어졌다. 두번째 시험은 암투병 중이었던 아버지 간호로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난 뒤 보게 되었다.

쓰나미 이후, 스테판은 그의 형이 휴가를 보냈던 카오락 Khao-Lak 소피텔 피해자 협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나는 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에는 어쩌지 못한다. 하지만 약간의 평온을 가져다 줄 수 있고, 협회 설립을 도와줄 수 있으며, 가능한 덜 힘들게 살수 있게 한다. 그들이 더이상 희생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사고 동안 그는 복잡한 가족사를 가진 각계 각층의 사람들과 어우러지며 그들의 고백들을 듣게된다. 이에 그는 ‘’이런 것들이 나에게 인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그는 프랑스 우파 정치인인 알랑 쥐페 Alain Juppé 의 시장 선거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치 쪽에 관심이 없다. 혹자들은 펜박 FENVAC의 독립성을 의심한다. 프랑스 법무부, 외교부, 혹은 프랑스 철도청처럼 다른 쪽에서 지원을 받지 않는가 ? 하고, 하지만 이런 것들이 때로는 가혹하기도 하지만 목소리를 높이지는 못하고, 그의 투쟁을 방해하지 못한다." 법정에서 부딪히는 이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른 곳에 가서 더이상 이야기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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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3,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한 스테판 직껠 

 

상 당한 유가족과 함께 우는 것은 그에게는 합당하지 못한 것

2011년부터 펜박은 SOS 테러 구조협회의 프랑소와즈 뤼데츠키 Françoise Rudetzki와 협조해서 테러 피해자들을 돕고 있는데, 그 이후 스테판 직껠은 휴가나 취미 생활도 없이 일만 하고 있다. 이에 그는 ‘’측근들이 걱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유용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상 당한 유가족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피해자들의 위치에 자신을 놓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서비스에 전력을 다한다. 이런 정신이 그들과 거리를 잘 유지하게 해준다’’고 한다.

완벽주의에 가까운 스테판은 일을 위임하지 못한다. 프랑소와즈 뤼데츠키는 ‘’스테판이 임무의 크기에 직면해서 지칠 수 있다’’고 했고, 쓰나미로 가족을 잃고 재혼해서 지금 두 자녀를 둔 그의 형은 ‘’길이 너무 멀다.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스테판은 균형을 찾았다고는 하지만, 직업병처럼, 이상한 소리만 들려도 그동안 작성한 보고서 내용이 상기되고, 호텔의 비상구가 어디 있는지 찾게 된다고 한다.

부르타뉴 출신인 그는 카톨릭 학교에서 자랐고, 수호천사를 믿고 있다. : ‘’프랑소와 미테랑이 주장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정신의 힘을 믿지는 않는다. 우연이라고 치부해 버릴수 없는 징후들은 항상 있다고 했다.  

그의 이같은 합리성은 희생자 지원에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 파리와 마르세이유 두 군데에 집단 사고 특별 법률부가 설립되었다. 그의 승리였다. 스테판 직껠은 재난에서 교훈을 끄집어 내기 위해 회사들과 함께 일하기도 한다 : ‘’희생자들은 사고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다르다.’’

프랑스 일요신문과의 인터뷰 당시 스테판은 펜박 FENVAC을 유럽으로 범위를 넓혀가겠다고 했는데, 1년 반이 지난 지금 펜박은 이미 유럽으로 확장되었다. 당시 그는 샤를리 엡도 테러의 18명의 고아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했다. 2015 1 11일에 있었던 국민 대행진에 스테판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이어가기 위해 있고, 경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 자주 희생자들을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그는 아니다’’

펜박은 1995년에 설립되었고, 바로 기소권과 수사권을 요청해서 1년 안에 획득했다. 프랑스는 대중 교통과 공공 장소에서 벌어진 사고의 피해자 단체의 기소권과 수사권이 20년 전에 주어졌다. 그리고 몇년 뒤에는 그 범위를 확대 해 공공장소뿐만 아니라 주거, 사무실 지역까지 포함시켰다. 펜박은 프랑스 법무부와 관계되어 있고, 그쪽에서 예산을 받지만 운영은 독립되어 있다

테러나 재난이 발생하게 되면 4시간 안에 관계 장관 회의에 펜박 임원들이 참여하게 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첫번째 임무는 피해자들이 협회를 조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11월 파리 테러 희생자 협회에서도 이같은 권리를 가지게 해달라고 프랑스 정부에 요구했고, 바로 얼마전 관련 법률이 통과되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작년에 있었던 두 테러의 영향으로 올 2월부터는 희생자 구조 정부 부처가 생겼다.

                                                                      

<파리광장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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