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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1994년 르완다 소수인종 80 만명 대학살에 연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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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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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 인종 수십만 명이 학살됐던 1994 '르완다 제노시드/제노사이드((Génocide au Rwanda), Genocide, 인종말살)'에 프랑스 군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르완다 인종말살 진상조사 위원회(la Commission nationale de lutte contre le génocide (CNLG)/Rwanda's National Commission for the Fight against Genocide)'는 프랑스 고위급 군인 22명이 당시 르완다 대학살을 직접 계획하고, 실행에도 관여했다고 폭로했다.

르완다는 이미 수 년전부터 제노시드에 관여한 프랑스를 고발했다. 프랑스가 약 80만명에 이르는 르완다 국민, 특히 소수민족 투치(Tutsi)를 학살하는데 깊이 관여했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1990년 미테랑(Mitterrand) 정부 시절,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다수민족인 후투(Hutu) 정부에 대항하던 투치족 반군 진압을 위해 르완다에 군대를 파견한 사실이 있다.

반인도주의적 범죄를 재판하는 프랑스 법원은 19944 6, 대학살의 도화선이 됐던, 당시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브자리마나(Juvénal Habyarimana)의 암살 사건 재심을 최근 결정했다. 이후 일주일 만에 르완다 정부가 '프랑스 군대 학살 개입설'로 대응하면서 양국 간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양상이다. 현재, 르완다는 소수민족으로 불리는 투치족 출신인 폴 카가메(Paul Kagame) 대통령과 정부가 집권하고 있다.


첨예한 종족 갈등이 부른 대참사

1994년 르완다에서는 4월 초부터 약 100일 동안 주민 80만 명이 살해됐다. 다수 부족인 후투(Hutu)족 강경파가 소수 부족인 투치(Tutsi)족과, 종족 간 화합을 주장했던 후투족 온건파 모두를 학살한 사건이다.

비극의 발단은, 1994 4 6일 당시 대통령 주베날 하브자리마나가 비행기를 타고가다 피격을 받아 사망한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계기로 당시 100일간에 걸쳐 집권세력인 후투족이 소수인 투치족에 대한 대량학살을 감행한 것이었다. 르완다는 인구 1,230만 명 가운데 85%가 후투족, 14%가 투치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0일간 지속된 학살에서 인구의 약 10% 가 사라진 것이다. 집단 학살 외에도, 200만 명이 난민으로 국내외를 떠돌게 됐다. 여성 20만 명이 성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당시 집권세력인 후투족이 물러나고 대부분 투치족으로 구성된 르완다 애국전선(RPF; Rwandan Patriotic Front)이 권력을 장악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반군을 이끌던 폴 카가메(Paul Kagame)1994 7월 사태를 수습한 뒤 국방장관에 오르고, 현재는 대통령으로 국가를 통치하고 있다.

문제는 투치족 출신의 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투치족 반군진압에 군대를 파견했던 프랑스가 엄청난 외교적 부담을 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카가메 정부는1994년 당시 프랑스 정부의 '제노시드 개입설'을 수 년에 걸쳐 집요하게 지속적으로 주장해오고 있다. 이번에 제기된 프랑스 고위급 군인들의 '조직적 개입 의혹'도 이 연장선에 있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러한 주장에 줄곧 강경적인 태도로 대응하며, 특히 제노시드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2006년에는 프랑스 법원이 하브자리마나 전 대통령의 비행기 격추 사건 혐의자로 르완다인 9명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해 국교가 3년간 단절되기도 했다. 이후 국교가 다시 정상화 되었지만, 프랑스 정부의 제도시드에 관한 입장은 변함없다.

 

르완다 종족 갈등은 식민 지배의 산물

현대 인류 역사상 비극 중의 비극으로 손꼽히는 르완다 제도시드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족간 갈등의 원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르완다 종족 갈등의 시작은 1916년 벨기에의 식민 통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는 당시 통치술의 하나로 '종족차별정책'을 시행했다. 소수인 투치족을 중간 지배계급으로 대우하는 반면, 다수인 후투족을 홀대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62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억압받던 후투족이 패권을 쥐게 된다. 후투족은 투치족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투치족은 르완다 산악지대나 나라 밖으로 도망쳐 반군이 된다.

1973년 후투족 출신의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정권을 잡고 국가 수장이 된다. 독재 체제를 이어가던 하브자리마나는 1990년 위기를 맞는다. 변방에서 세력을 키운 투치족 게릴라가 르완다 정규군을 차례차례 쳐부수며 수도 키갈리까지 근접한 것이다.

이때 하브자리마나 정권을 위기에서 구한 나라가 프랑스다. 당시 프랑스와 미테랑 정부가 낙하산 부대를 르완다에 파견하면서 반군의 진격을 막았다. 이 때부터 프랑스와 투치족은 적대적 관계가 된 것이다.

이후 평화적 해결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력 등을 받은 하브자리마나 전 대통령은 강경책 대신, 종족 간 타협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결정은 후투족 강경파들의 분노를 샀다. 1994 4 6일 하브자리마나 대통령은 외국에서 키갈리 공항으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격추로 사망한다. 이 사건은 그러나 투치족 반군의 공격인지, 평화적 해결을 반대하는 후투족 강경파의 암살인지는 불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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