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칼럼 분류

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0 <파리 밀레니얼스>

작성자 정보

  • 최고관리자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923ff69e56c95751304c03168ae388be_1751916798_4311.png
 

 20세기 후반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Georges Perec)은 1965년 에 데뷔작『사물들』을 출간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광의 30년'이라 불린 고도성장 사회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이 소설을 사람들은 차라리 사회학적 기록물에 가깝다고 말한다. 이야기 중심에는 ‘마켓 리서치’ 분야에서 일하는 젊은 파리지앵 커플, 실비와 제롬이 있다. 성공을 좇는 두 사람은 특정 사물에 대한 소비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페렉은 현실과는 반대되는 상상이나 희망을 묘사할 때 사용하는 조건법 현재 시제를 통해 두 사람의 집을 집요할 정도로 정밀하게 기술한다. 그곳에는 검정 가죽 소파, 참나무 옷장, 밝은 빛깔의 자작나무 책상, 스웨덴제 램프, 고전문학 서적과 예술 판화, 레코드판, 그 밖의 수많은 장식품들이 그 집 안에 '있을 것' 이라고. 그 공간은 소박해 보이는 테이블 하나마저 치밀하게 연출된 소비의 환상을 담고 있었다. 실비와 제롬에게 사물은 단순한 생활용품이 아니라 계급 상승의 수단이었다. 지식보다 취향이 계급을 결정짓는 시대 속에서 완벽한 사물로 채워진 집은 곧 완벽한 삶의 증거였다. “취향은 결코 무고하지 않다." 같은 시대를 사회학적 언어로 해석한 부르디외의 말이다. 


 2025년, 실비와 제롬의 손주 세대는 더 이상 부자가 되고 싶지 않다. 아니, 부자일 줄 안다고 믿었다. 페렉이 묘사한 집의 외관은 그대로지만 밀레니얼 세대가 채운 집 안의 '물건들'은 전혀 다르다. 임대 수익을 극대화 하기 위해 파리의 기존 아파트는 여러 개의 작은 임대 유닛으로 쪼개졌다. 남은 공간은 공유 주거(colocation) 형태로 바뀌어, 온라인 부동산 지도 위에 빼곡히 점을 찍고 있다. 어딘가 서로 닮은 집들은 마치 영원한 것은 허락하지 않는 임시 거처 같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하얀 외벽, 거의 유일하게 온기를 품은 원목 마룻바닥, 햇볕을 충분히 받지 못한 몬스테라와 그 양이 빈약한 덩굴식물, 해진 포스터와 합판으로 가린 대리석 벽난로, 천장 전등을 뽑아낸 자리에서 삐져나온 몇 가닥의 전선 줄기, 그리고 구석구석 반듯하지 못한 이케아 조명, 이케아 소파, 이케아 식탁, 이케아 러그. 벼룩시장에서 힘들게 들여온 작은 가구 몇 점은 그래도 사랑스럽게 빛이 바랬지만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갖춘 집들은 여름 바캉스를 앞두고 단기 세입자를 구하는 공고가 붙었다. 그중 일부는 에어비엔비에도 올라온 숙소였다. 마침내 우리는 집으로부터, 소유로부터 자유로워진걸까? 


혼자서 감당할 수 없는 임대료, 매일 좌절감을 안기는 교통난, 적은 대가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업무 속에서, 밀레니얼 세대는 더 이상 디자이너 가구나 신발 하나를 더 갖기 위해 삶을 갈아 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한다는 번아웃 증후군은, 어쩌면 물질주의의 정점이었던 페렉의 시대에서 유전처럼 이어받은 질병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미니멀리즘의 담론 속에서 성장했지만, 이 역시 소비로부터의 해방이 아닌 또 다른 소비 방식에 불과했다. 소유 대신 경험을 중시하는 이른바 '경험 소비'에 집중하면서 더 많이 갖고 싶었던 과거의 환상이 ‘덜 가질 수 있다’는 환상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겉으로는 티가나지 않는 윤리적이고 친환경적인 상품들, 라이프스타일 코칭, 요가와 명상 수업, 각종 프리미엄 구독 서비스, 모로코나 알바니아로 떠나는 '웰니스 리트리트' 여행들까지. SNS 공유로만 완성시킬 수 있는 이 모든 경험은 5평짜리 신발상자 같은 공간에 갇힌 삶에 대한 보상이다. 완전한 물질주의자도, 디지털네이티브도 되지 못한 밀레니얼스는 취향으로 삶을 완성하고도 여전히 공허하다. 그러나 방금 올린 포스트에 '좋아요'가 하나 눌리고 나면 정체성에 대한 무거운 고민은 잠시 잊기로 한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