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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아줌마의 <파리 유학생활-그때 그 시절>,'대한항공에 흡연석이 있었던 시절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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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기내에 설치되어 있는 금연 표시등


나는 유학 중에 파리에서 아이들 아빠를 만나 한국에 들어가서 결혼식을 올리고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계속 학업을 이어나갔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 해에 한국, 대구에 있는 동생이 결혼을 했다. 당연히 한국을 나갔다. 무더운 여름, 동생의 결혼식이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결혼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당시 이상하게 건강이 안좋았다. 몸은 물에 젖은 솜덩어리 같이 무거웠고, 무언가 예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항상 바빴던 남편은 나를 공항에 늦게 데려다 주어, 비행기 뒤쪽 좌석에 배치되었다. 


당시 인천 공항은 생기지도 않았고, 파리 드골 공항과 김포 공항에는 대한항공만이 다 니고 있을 때였다. 몸이 안좋았던 탓에 기내에서 입을 편한 치마를 준비하는 나름 신경을 썼는데, 뒷자리 즉, 흡연석에 배치가 된 것이다. 당시 대한항공의 뒷자리는 흡연석이었다. 비행기안에서 흡연이라니, 지금 같으면 상상하지 못할 흡연석이 당시에는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이후 대한민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서는 항공보안법 및 국제민간항공협약에 따라 기내에서의 흡연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기내 흡연이 금지되기 시작하여 2000년대에 들어 완전히 정착했다. 나는 당시 결혼한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이른바 ‘새댁’이었다. 어쩔 수 없이 대한항공의 흡연석에 자리를 잡고 동생 결혼식을 위해 한국으로 떠나는 날, 나의 바로 옆자리에는 콧수염이 있는 한국 남성이 앉았다. 그는 내가 안스러웠는지, ‘이 자리에서 가기 힘들 것’이라고 하면서, 조금 있다가 앞쪽에 있는 일행과 자리를 바꾸어 주겠다고 한다. ‘뭐 그렇게까지’ 싶어, ‘괜찮다’고 했다. 좋은 분 같았다. 짐작하기로는 그분은 담배를 마음껏 피고 싶은데 옆에 앉은 내가 걸렸던 것 같았다. 그렇게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어느 순간 그 콧수염 아저씨는 쪽지를 나에게 건네면서, 좌석 번호를 주고는 그 사람 자리에 가서  있으라고 한다. 쪽지에는 ‘000 씨 이리로 오시요’라고 적혀 있었다. 사양하지 않았다. 


뒷편 흡연석에서 2등석으로 

엉기적거리며 앞쪽으로 가니 거기는 같은 3등석이 아닌 2등석이었던 것이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그분에게 언제든지 불편하시면 오시라고 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5시간 정도 자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었다. 솔직히 살 것 같았다. 나중에 다시 자리를 돌려주고 흡연석으로 가서는 콧수염 아저씨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무엇하시는 분인지 조심스럽게 여쭈어 보았다. 그는 대구에 재불 작가들 데리고 전시를 위해 가는 길이라고 한다. 

생명의 은인 같이 고마워서 건네는 명함을 받아들이고는 전시 때 꼭 꽃을 사들고 가야지하고 다짐했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의 고향 대구는 그 해 여름, 아스팔트가 눅눅해질 정도로 무더웠다. 그런 무더위 속에서 동생 결혼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엄마를 따라 다녔고, 몸은 여전히 힘들었고, 이상하게 예민해져서는 아버지와 오빠의 별것 아닌 한 마디에 발끈거리곤 했다. 나 스스로가 이상했다. 정상이 아니었다. 나에게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다.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이상해서 피검사를 해 본 결과 임신이었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왜 그렇게 몸과 마음이 힘들었는지 말이다. 그리고 대한항공 기내 흡연석에서 만난 콧수염 아저씨가 나도 모르게 내 뱃 속에서 움트고 있던 생명을 보호해준 셈이었다. 그때 아이가 태어나 이제 30살이 되었다. 콧수염 아저씨가 대구 전시에 데려간 작가들 중에는 지금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얼마전 둘째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 믿기 힘들다고 한다. 하지만 이건 팩트고,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그랬다. 


<파리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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