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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34 <수플레(souffl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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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플레는 가장 프랑스적인 요리 중 하나다. 미리 준비하지 않아도 계란·우유·버터· 치즈처럼 가정집 찬장에 흔히 있는 단출한 재료만으로 만들 수 있다. 겉보기에 소박해 보이는 이 요리는 사실 놀라울만큼 정교한 ‘기술적 조건’을 요구한다. 수플레가 우아한 구름처럼 솟아오르려면, 먼저 달걀 흰자를 노른자나 지방과 철저히 분리하고 공기를 최대한 머금으면서도 단단하게 거품을 쳐 머랭을 완성해야 한다. 반죽이 그릇 벽을 따라 고르게 상승할 수 있도록 적절한 용기를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 안쪽은 알맞게 익으면서 바깥은 황금빛 껍질이 형성되도록 오븐의 온도와 습도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다. 찬 공기가 유입되거나 형태가 절정에 이르는 아주 짧은 순간이 지나면 수플레는 금세 가라앉고 만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아무리 정성껏 레시피를 따르더라도 수플레의 성공은 보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치 모든 완벽한 레시피속에는 언제나 우연이라는 재료가 숨어 있는 것처럼.


9월 10일, 프랑스 전역에서 “모든 것을 멈추자(bloquons tout)”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노동자들은 마치 한창 부풀어 오르는 수플레가 있는 오븐 문을 열어젖히듯 국가 봉쇄를 선언했다. 정부의 공공지출 삭감, 연금 동결, 그리고 무엇보다 공휴일 폐지에 대한 부당함을 느낀 시민들의 분노는 곧 엘리트를 향한 저항으로 번졌다.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지만 프랑스 정치는 1789년 신분제를 폐지하고 법적 평등을 제도화한 이래로 나름대로 “평등하게” 부풀어 오르는 데 성공했다. 19세기 초, 세금과 재산 기록이 통계화되면서 불평등 지수가 뚜렷하게 드러났고 그 수치는 지금까지 꾸준히 감소하는 추세다. 프랑스가 시장경제의 논리를 따르면서도 노동자와 고용주가 연대하는 사회보장제 같은 복지를 더해 만든 혼합 경제 모델은 한때 다른 선진국들의 롤모델로 자리 잡는 듯했다. 그러나 이 프랑스식 복지국가 '레시피'는 1974 년 이후 반세기 넘게 단 한 번도 재정 흑자를 내지 못한 채 조리되고 있었다. 마크롱은 프랑스가 선택한 새로운 셰프였다. 그는 의도적으로 수플레의 봉우리를 꺼뜨려 요리를 완성시키는 도발적인 조리법을 들고 나왔다. 하지만 2024년 의회를 해산시킨 그의 '와해적(disruptive)' 정치는 최근 연쇄적으로 총리가 교체되는 혼란 속에서 먼저 의심스러운 균열을 드러냈다. 


마크롱이 당선되던 즈음 영국은 브렉시트를 선택했고,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며,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은 여전히 압도적 득표로 권력을 연장했다. 권위주의와 극우 민족주의가 다시 제도권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계 곳곳에서, 아니 세계 자체를 의도적으로 붕괴시키고 다시 재건하려는 충격요법의 레시피가 빠르게 퍼져나갔다. 부풀어 오르기만 하는 복지는 환상에 불과하며 시간이 지나면 결국 터져버릴 것이라는 경고가 뒤따랐다. 한 번 꺼뜨리더라도 다시 부풀어 오를 것이라는 어느 주방장의 고집이 정치 담론을 지배했다. 정말 무너뜨림을 통해 이상적인 형태에 이를 수 있을까, 아니면 전통적인 정치 레시피의 해체는 결국 그릇에 깊은 금을 내며 정치 자체의 붕괴로 이어지는 것일까. 사회학자 장 비아르(Jean Viard)는 "독일은 산업에서, 영국은 교역에서 힘을 얻지만, 프랑스가 빛나는 순간은 언제나 정치가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때였다"라고 강조했다. 수플레라는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낸 동력은 그 어떤 재료도 아닌 상상력이 아니었던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혀 위에서 부드럽게 사라지는 완벽한 수플레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불안정하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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