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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26 <(대)도시를 떠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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뉠 듯 말 듯 길어진 해가 밤 9시까지 도시를 밝히며 완연한 봄을 알린다. 봄의 해는 혹독한 겨울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다. 유달리 짧은 겨울 해와는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짧아지기 시작하는 여름의 낮보다도 오히려 더 길게 느껴진다. 바뀐 계절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계간지 『르갱(Regain)』 매거진을 펼친다. 

출간 이후 일곱 번째 봄을 맞은 르갱의 지면에는 노르망디 습지를 점령한 황새들, 이제 막 태어난 새끼양, 조밀하게 묶인 제비꽃 꽃다발, 그 밖에도 지방 도시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일상이 가득하다. 시골은 정체되어 있다고 하지만,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도시보다 빠르고 선명하다.

지방 소도시의 소소한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르갱은 한때 일부 예술 서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조용한 책이었다. 그러나 5년 전, 코로나19 봉쇄 조치 이후 도시 탈출의 열망과 함께 르갱 매거진의 수요는 꾸준히 증가했다. 시골 감성과 현대적 세련미가 결합된 이 매거진을 두고 르 몽드(Le Monde)는 '러스틱 시크(rustic chic)'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제 이 독립 매거진은 동네 작은 가판대(Kiosque)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으며, 광고를 거의 배제했던 초창기와 달리 매체 선택에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한 에르메스의 광고까지 싣게 되었다.



도시인은 시골을 동경한다. 시골 신문(journal de campagne)을 표방하는 르갱 매거진 역시 파리에서 만들어지고 발행되며, 독자의 대다수는 도시 거주자이거나 갓 이주한 신(新) 시골인 들이다. 변화하는 부동산 시장과 소비 습관, 원격 근무의 확산 속에서 파리지앵들의 전원생활에 대한 갈증은 끊임없이 드러난다. 

최근 SNS에서는 ‘#시골집코어(cottagecore)’라는 해시태그가 부쩍 눈에 띈다. ‘시골집(cottage)’과 취향 또는 정체성을 의미하는 접미사 ‘-core’가 결합된 이 단어는, 단순히 시골 살이의 적막함에 대한 무지나 조용한 삶에 대한 막연한 동경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흐름을 품고 있다. 

귀촌 트렌드를 이끄는 르갱 매거진의 편집장 다프네 에자르(Daphné Hézard)는 "우리는 시골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시골이 지닌 활력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광활한 초원을 가르는 야생 동물의 움직임, 균일하지 않은 토양 위에 다양한 종자가 얽혀 자라는 풍경, 족히 스무 명은 먹일 만큼 가득 끓여지는 수프 안에는 도시가 품을 수 없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새로운 세대의 농부와 환경 운동가들의 단단한 초상을 담은 인터뷰 꼭지를 에자르는 다가올 미래를 앞서 살아가는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명명했다.



건강과 자연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되찾는 것이다. 르갱 매거진이 '새로운 시골(Néo-Rural)'이라는 전위적 타이틀을 내세우면서도, 잡지 이름으로 '회복'과 '재생'을 뜻하는 '리게인(regain)'을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불어로 '르갱(regain)'은 벌초 후에 다시 자라나는 풀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종이 매체가 퇴조하고 삶이 대도시에만 집중되는 흐름 속에서, 인쇄 매거진이라는 느린 형식을 통해 고립되고 잊혀가는 소도시의 풍경을 불러내고 되살리려는 잡초 같은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프랑스는 자연과 맞닿은 생산활동과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저널리즘 문화를 탄탄하게 지켜내고 있다. 내가 미국이 아니라 유럽을, 그중에서 파리를 목적지로 선택한 이유다.

2014년부터 연임 중인 파리 시장 안 이달고(Anne Hidalgo)의 슬로건은 '숨 쉴 수 있는 도시'다. 그녀는 산업화 이후 줄곧 벌어져온 자연과 인간사이의 균열을 화해시키기 위해 파리 곳곳을 초목과 보행자 공간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파리가 지나치게 느려지고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는 보다 인간적인 속도로 나아가고 있다.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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