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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의 <파리의 연인들>(10)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올가와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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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 

11년 동안 제인 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는 열정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의 이별은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특히 예술적인 유대—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다. 가수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제인 버킨은 배우로서 먼저 경력을 시작했다. 그녀는 고향인 영국에서 몇 편의 영화를 찍은 뒤, 1960년대 말 프랑스로 건너왔다. 당시 그녀는 작곡가 존 배리와 이혼한 직후였다. 1969년, 그녀는 피에르 그림블라 감독의 영화 <슬로건>에 출연하게 되는데, 이 작품의 촬영 중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을 인물, 바로 세르주 갱스부르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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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주 갱스부르와 제인 버킨 (1976년)


처음엔 갱스부르의 명성과 예술적 존재감에 위축되어 불편함을 느꼈지만, 곧 그의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열정적인 사랑을 시작하고, 이들의 관계는 1971년 딸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제인 버킨은 세르주 갱스부르의 새로운 뮤즈가 되었고, 그의 권유로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이들은 "Je t’aime… moi non plus" 같은 도발적인 곡부터 "Di doo dah", "Ex fan des sixties" 같은 가벼운 곡까지, 수많은 히트곡을 남긴다. 

10여 년 동안 제인 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는 프랑스, 나아가 세계적인 미디어 속에서 ‘이상적인 커플’로 주목받았다. 제인 버킨은 배우로서의 활동을 이어가며, 동시에 갱스부르의 작사·작곡 재능 덕분에 뛰어난 가수로서의 입지도 다져갔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세르주 갱스부르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고, 그로 인한 폭력도 있었다. 방탕한 생활과 함께 자신도 점점 술에 의존하게 된 제인 버킨은 결국 1980년 9월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한다. 이 결정은 세르주 갱스부르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비록 연인 관계는 끝 났을지라도 예술적인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갱스부르는 여전히 그녀를 인생의 여인으로 여기며 자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주었고, 이 둘의 협업은 1983년 발표된 전설적인 앨범 "Baby Alone in Babylone"으로 이어졌다. 그는 단지 그녀를 위해 곡을 쓰고 작곡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개인적이고 심지어 더 친밀한 방식으로 그녀 곁에 머물렀다. 


1982년, 제인 버킨이 영화감독 자크 드와용과의 사이에서 딸, 루 드와용을 출산했을 때, 그녀는 세르주 갱스부르에게 대부가 되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기꺼이 이를 수락했고, 아이에게 선물 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예술가 사이의 융합적인 관계는 수년간 지속되었으며, 육체적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만큼 깊고 강렬한 유대였다. 그들의 관계는 1991년 세르주 갱스부르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두 사람 사이의 유대를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제인 버킨은 생전에도, 사후에도 그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남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그녀는 공연 중에도 종종 그의 곡을 부르며 헌사를 바쳤다. 


특히 갱스부르가 세상을 떠난 두 달 뒤, 파리 카지노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그녀가 "Je suis venue te dire que je m’en vais"(나는 너에게 떠난다고 말하러 왔어)를 부른 순간은 관객들에게 잊지 못할 감동을 안겨주었다. 제인 버킨은 2023년 갱스부르의 뒤를 따라갔다. 



■ 올가와 피카소 

피카소와 올가 코클로바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전에 결혼했으며, 피카소가 여러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올가가 1955년에 사망할 때까지 법적으로 부부였다. 두 사람은 17년간 함께 살며 아들 하나를 두었고, 별거 이후에도 올가는 피카소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그녀가 피카소와 그의 애인들을 뒤쫓았다는 소문도 돌았다. 피카소와 올가 코클로바는 러시아 발레단 을 이끌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통해 만났다. 올가는 그 무용단의 무용수였고, 피카소는 무대 장치와 의상 디자인을 맡아 <파라드>라는 혁신적인 공연에 참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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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의 초상화 앞에 선 피카소


피카소는 올가의 아름다움과 세련된 태도에 매료되었고, 발레단의 스페인 투어에 함께하며 전통 스페인 레이스 망토를 쓴 올가의 초상화를 남겼다. 실제 만틸라 대신 식탁보를 사용한 이 그림은 매우 유명하다. 디아길레프는 피카소에게 “러시아 여성은 훌륭한 아내가 된다”고 말했고, 사랑에 빠진 피카소는 결혼을 결심한다. 올가의 바람대로 피카소는 일시적으로 입체파를 벗어나 신 고전주의 스타일로 화풍을 바꾸게 되며, 이 는 ‘신고전주의 시기’ 로 불린다. 


피카소는 올가를 다양한 모습으로 자주 그렸다. 그녀는 발레를 그만두고 투어도 포기했으며, 다리 부상 이후 주로 의자에 앉아 지내며 그림 속 주제가 되었다. 러시아에서 혁명과 내전이 터지자, 가족과 연락이 끊기고 난 이후 가족의 비극적인 소식이 도착하면서 올가는 깊은 우울에 빠졌다. 이 시기 그녀의 초상화들은 대부분 침울하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1921년, 아들 파블로가 태어나자 피카소는 기쁨에 찬 그림들을 그리며, 올가와 아이를 성모 마리아처럼 묘사했다. 하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두 사람의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했다. 올가는 피카소의 외도를 의심했고, 몬테카를로에서 디아길레프와 재회했을 때 피카소가 젊은 무용수들에게 빠진 모습을 보고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시기부터 피카소는 올가의 현실적인 이미지에서 점점 멀어지며, 점차 왜곡된 형태로 그녀를 그리기 시작한다. 이는 그의 초현실주의 시기로 이어졌다. 이후 새로운 연인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되면서 피카소의 화풍은 다시 밝아지고, 올가는 점차 ‘괴물’ 같은 형태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게 된다. 


1935년 올가와의 공식적인 별거 이후에도 피카소는 그녀를 계속 그림 속에 담았다. 그녀는 이제 한때의 아름다움 대신, 피카소의 내면 갈등과 분노를 반영한 무서운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피카소와 올가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예술적 열정, 질투, 상실, 고통이 뒤엉킨 복잡한 서사였으며, 그 감정들은 고스란히 피카소의 작품 속에 스며들었다.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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