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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아줌마의 <파리 유학생-그때 그시절> 한국으로 편지 보내면 북한으로 가버리기도 하던 그 시절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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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파리로 와서 나는 선배 언니가 구해준 1달만 머물 수 있는 방에 기거했다. 파리 12구였는데, 예전 외국 영화에서나 봄 직한 예쁜 빌라였는데 오스만(Haussmann)식 건물이었다. 계단 몇 개를 올라가면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는 곳으로, 나름 운치 있고 좋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기밥솥과 집에서 챙겨 준 반찬 몇 가지로 난생처음 내 손으로 밥을 해 먹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는 110볼트가 대다수였다. 적어도 대구에 있던 나의 집에는 그랬다. 지금 같은 압력밥솥은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라 전기밥솥을 사면서 220볼트로 전환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렇게 나는 방에서 전기를 꽂고 밥을 했다. 밥솥이 데워지는가 싶더니만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더 이상 작동을 하지 않았다. 


심란했다. 산 설고 물 설은 외국에서 밥을 해 먹어야 하는데 가져온 밥솥이 고장이 난 것이다. 그 외에도 한국에 있었으면 별일 아닌 것들이 이곳에서는 큰 일이 되어 버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 요즘 같이 다 지어진 쌀밥인 ‘햇반’은 있지도 않던 시절이었고, 솥에 밥을 해먹는 것은 상상도 못했고, 더군다나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고장이 났으니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까, 고민하다가 선배 언니와 함께 혹시나 싶어 밥솥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엄마가 당부를 하였건만 밥솥을 구입한 곳에서 220볼트로 전환해 놓지 않았던 것이다. 밥솥 밑에 전환할 수 있는 곳을 다행히 발견했고 간단히 220볼트로 전환을 하고 나니 밥솥은 아주 잘 작동이 되어 오랫동안 잘 사용했다. 단지 솥을 드러내면 아래 열판에 약간의 그을음만 있었고 밥이 되는 데 아무 문제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위험천만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게 어리버리하니 아무 것도 모르던 유학생은 생활인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한국으로 편지 부치면 도착하는데 2주일 정도 걸려 

그렇게 멀리 떠나와서는 가족이 있는 한국과는 어떻게 연락을 했을까? 잠시 생각을 해 보았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전화 아니면 편지였다. 전화도 이른바 국제 전화여서 비용이 만만치 않았고, 엄마가 가끔 전화를 했던 것 같다. 가장 용이한 소식통은 편지였다. 당시 나는 참 많은 편지를 써서 한국으로 날렸다. 그런데 한국에 도착하는데 10일에서 2주일 가량 걸렸다. 

한국과 카톡으로 실시간 대화할 수 있는 요즘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때는 그랬다. 


내가 파리에 정착하는 데 도움을 준 선배 언니가, "편지를 부칠 때 꼭 서울(Séoul)을 명시하고, 남한(Corée du Sud)을 빨간 줄로 강조해서 보내라"고 당부했다. 그러지 않으면 북한으로 편지가 갈수도 있다고 한다. 


한국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 우체국 직원이 남한(République de Corée)과 북한 (République populaire démocratique de Corée)이 헷갈려서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는 것이다. 


일례로 지난해 파리 올림픽에서 남한 선수 들이 입장할 때 북한 명칭을 썼던 사회자의 실수가 있었다. 그만큼 프랑스인들에게 남한과 북한의 공식 명칭은 쉽게 구분되지 않은 가 보다. 


얼마전 한국으로 소포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에서 무게당 비용을 알아보는데, 남한으로 보낼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직원이 "République이에요? populaire démocratique이에요?" 하고 아직도 물어온다. 


 번의 강산이 변하는 동안 파리에 살다 보니 포플레르(populaire)가 들어가면 북한인 줄은 알았기에 당당하게 레프블릭크 (République)라고 대답했다.   


당시 유학생들에게 거의 유일한 한국과의 소통 수단이 편지였을텐데 북한에 가서 정처 없이 떠돌다가 어떻게 처분되었을지 모를 편지들이 있었다. 


수년 전, 한국을 다녀가면서 동생이 그 시절 내가 보냈던 편지들을 정리해서 주길래 무슨 보물단지처럼 파리로 가져왔다. 


1989년 8월 4일 날짜로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 난 이렇게 적어놓았더라: 

 "한마디로 여긴 사람 살기 좋은 곳이다. 모든 것들이 인간 중심이고, 모든 paris 사람들이 아주 친절하다" 라고… 


하지만 그 이후 파리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파리아줌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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