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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의 <파리의 연인들> (5)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안느 펭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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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과 안느 펭조, 숨겨진 사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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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미테랑과 안느 펭조 (1973년) 


안느 펭조의 <안느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이 옛 연인에게 보냈으며 프랑스 사회당 리더의 또 다른 삶을 보여주는 1,200여 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그녀가 “내 삶의 행운”이라고 말했다. 안느 펭조는 이 옛 국가수반이 32년 동안 연인이었던 그녀에게 쓴 1,218통의 편 지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그녀는 그녀가 “귀요미 프랑수아”라는 별명으로 부른 남자가 죽고 20년이 지난 뒤에 모두의 예상을 깨고 이 책을 출판했다. 이 여성은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그늘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안느 펭조가 프랑수아 미테랑을 처음 만난 것은 그녀가 열네 살 때였다. 미슐랭 가문의 먼 사촌인 그녀의 부모는 랑드 지방의 오스 고르라는 마을에 별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은 니에브르 도의 도 의원에 불과 한 프랑수아 미테랑의 친구가 되었다. 1943 년생인 안느 펭조는 당시 미테랑 부부의 큰아들인 장-크리스토프보다 겨우 세 살밖에 많지 않았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연극 공연 때 처음으로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그녀를 눈여겨보았다. 미테랑의 세 아들 중 한 명인 질베르 미테랑은 말한다. “1960년대 초였지요. 골프 시합이 끝나고 나서 다들 펭조 씨네 집으로 아페리티프를 마시러 갔지요. 나는 그때 안느 펭조와 마주쳤습니다. (...) 평생 동안 난 장례식 때를 제외하고는 그녀와 세 번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 겁니다.” 


1960년대 초, 안느 펭조는 대학입학자격시험 합격증을 호주머니에 넣고 클레르몽페랑 을 떠나 파리로 올라갔다. 그녀는 “장식미술을 공부하고 나서 결혼을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 여성이 파리에서 유리 세공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추천인” 이 필요했다. 미테랑 부부가 이 역할을 맡았다. 이때 안느 펭조는 이 사회당 리더에게 매혹되었다. 


그녀는 영국의 저널리스트 필립쇼트에게 “그는 흥미로운 사람이었어요. 우월한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으로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지요”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는 1963년에 시작되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마흔일곱 살, 안느 펭조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안느 펭조는 필립 쇼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미리 계획된 일이 아니었어요. 그건 나를 넘어서는 문제였죠.” 그녀는 이 사회당 지도자의 연인이 되었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아내 다니엘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미테랑 부부의 친구 들은 그것이 그의 정치적 경력을 유지하거나 가족의 가치를 지키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느 펭조의 설명은 다르다. “그는 결코 어떤 선택을 포기하지 않았어요. 다니엘 미테랑은 그가 한 선택이고, 그는 이 선택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이 젊은 여성은 어둠 속에 남아 있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처럼 이중생활을 하려면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 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수아 미테랑의 격려와 그녀의 예술에 대한 열정에 힘입어 미술관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대통령 후보가 된 프랑수아 미테랑은 1965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가 끝나고 2차 투표가 시작되기 전의 기간에 그녀가 “지방자치단체협의회”에 관한 논문을 쓰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안느 펭조는 몇 년 만에 그녀가 일하는 분야에서 하나의 “보증수표”가 되었다. 


“그녀는 드가와 보나르, 고갱 등 19세기 프랑스 조각을 재발견하게 해주었지요.” 


오르세 미술관의 한 큐레이터는 프랑스 주간신문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전(前)대 통령이 시작한 오르세 미술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특히 그녀는 낭트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발견된 6대륙 조각들을 오르세 미술관 앞의 광장에 설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86년 12월 1일 오르세 미술관이 개관했을 때 가이드 노릇을 한 사람이 바로 안느 펭조였다. 그녀 앞에 자크 시락과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그리고... 프랑수아 미테랑이 서 있었다. 그 당시 대통령의 측근 몇 명만 두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를 알고 있었다. 


안느 펭조는 루브르 미술관의 복원에서도 어떤 역할을 맡았을까? <르몽드> 신문에 따르면 루브르 미술관의 피라미드는 어쨌든 “프랑수아 미테랑의 선물”이었다. 안느 펭조는 매일 같이 오르세 미술관에서 루브르 미술관까지 걸어가서 공사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를 보곤 했다. 


루브르 미술관의 전임 관장이었던 미셀 라코트에 따르면 알렉상드르 3세 다리의 복원을 결정한 것도 안느 펭조였다고 한다. 그녀와 대통령의 사랑은 계속된다. 안느 펭조는 계속해서 여자를 정복하는 프랑수아 미테랑의 유일한 연인은 아니었다. 반대로 이 젊은 여성은 다른 남자는 알지 못했다. 그녀는 필립 쇼트에게 말했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감탄하 는 것은 큰 행복이지요... 32년 동안 저는 너무나 행복했고... 또 너무나 불행했어요!... 정말 힘들었거든요...” 


이 선택에 대한 설명은 그녀가 가진 가톨릭의 가치 속에 있다. 


“그렇지만 그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죄였고, 저는 그 죄를 옛날의 가치에 따라 모범적인 삶으로 벌충했지요.” 


그녀는 프랑수아 미테랑에게 이혼도 요구하지 않았고 변함없는 사랑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오직 한 가지 바람뿐이었다. 즉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프랑수아 미테랑은 그녀의 이 유일한 소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1974년 12월 18일 마자린 펭조가 태어났다. 안느 펭조는 반쯤 농담조로 "그 아이는 그가 내게 준 유일한 선물이에요"라고 말했다. 마자린 펭조의 존재는 1994년, 그녀와 그녀의 아버지 미테랑의 사진이 <파리마치>지 1 면에 실릴 때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지 않았다. 


 1981년 5월 10일 프랑수아 미테랑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을 때, 안 펭조는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까 우려했다. 그녀는 새로운 국가 원수로부터 전화를 받은 후 "오늘은 제 인생 최악의 날이에요"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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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1월 11일 미테랑 전 대통령 장례식에서 안느 펭조(오른쪽)와 딸 마자린


이런 이중 생활은 프랑수아 미테랑이 암으로 죽을 때까지 14년 동안 계속되었다. 안느 펭조는 그의 병을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막 날까지 미테랑 옆에 있었다. 미테랑의 부인 다니엘 미테랑은 장례식에 이 모녀를 초대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결국 이 두 가족은 1996 년 1월 11일 샤랑트 자르나크의 묘지에서 거행된 미테랑의 장례식에서 재회했다. 다니엘 미테랑은 아들 장크리스토프와 질베르와 함께 있었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안느 펭조는 딸 마자린을 위로하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수아 미테랑의 두 삶이 화해하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 안느 펭조는 익명으로 돌아와 2011년 은퇴할 때까지 에콜 뒤 루브르에서 큐레이터와 교사로 일했다. 


<이재형 작가>


-이재형 작가와 함께하는 파리 미술관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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