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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35) -아비뇽(Avignon), 중세가 살아있는 교황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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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퐁뒤가르
“단순히 수도교에 불과한 이 건축물은 깊은 정적 속에 웅장하게 서 있다. … 퐁뒤가르 말고 나를 이처럼 깊은 몽상에 빠트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로마의 콜로세움뿐이었다.” -스탕달,《어느 여행객의 회고록》중에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며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방문하는 고대 유적 퐁뒤가르(Pont du Gard, ‘가르강 다리’라는 뜻)는 아비뇽에서 동쪽으로 25km 거리에 있다.
이 다리는 인류가 창조한 걸작품 중 하나이고 고대 세계의 경이이며 토목공학의 쾌거다.
높이가 48m에 달하는 이 다리는 3개의 아치형 구조물이 포개진 모양이다. 맨 아래층의 구조물에는 아치가 6개, 가운데 층의 구조물에는 아치가 11개, 맨 위층의 구조물에는 아치가 35개 있으며, 길이는 맨 윗부분이 273m에 달한다(원래는 360m 길이에 아치가 12개 더 있었다).
퐁뒤가르는 6세기까지 사용되다가 중세 때는 통행료를 징수하는 일종의 톨게이트가 되었으며, 18세기에서 20세기까지는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교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2000년에 자동차 통행을 금지하는 한편 주변에 무질서하게 들어서 있던 건물들을 철거하는 대규모 재정비 작업을 거쳐서 원래 모습을 되찾았다.
기원후 1세기, 로마 식민 도시였던 님(Nîes)은 날이 갈수록 번성하여 인구가 2만 명에 가까워졌다. 카발리에 산기슭에 있는 네마우수스 샘 만으로는 더 이상 도시 인구가 필요로 하는 식수는 물론 공중목욕탕과 샘, 공원에 필요한 물도 공급할 수 없었다.

퐁뒤가르
그리하여 북쪽의 위제스에 있는 외르 수원지에서 물을 님까지 끌어오기 위해 수도교를 건설하기로 한다. 그러려면 50km에 달하는 수로를 파서 물이 님까지 흐르게 해야만 했다. 이 엄청난 공사에서는 수로가 가르강을 건너게 하는 것이 가장 큰 난관이었으며, 이 난관은 퐁뒤가르 다리를 건설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정도 규모의 공사가 클라우디우스와 네로 황제 치하에서는 10년에서 15년이 걸렸지만, 퐁뒤가르는 채 5년이 걸리지 않았다. 위제스에서 님까지 이어지는 이 수로에는 수백 미터의 터널과 저수조 3개, 20개의 다리가 건설되었으며, 그중에서 가장 웅장하고 거대한 건축물이 바로 퐁뒤가르다.
이 수도교는 고대의 건축가들이 놀라운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길이가 50km에 달했지만 표고 차는 겨우 12m에 불과했다. 즉 경사가 1km 당 24cm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경이로운 수치는 고대 로마의 기술자들이 물이 중력에 의해 님까지 흘러갈 수 있도록 한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로는 언덕이 나타나면 우회하거나 지하수로를 통해 통과 하거나 허공에 걸쳐져 있는 수로교를 이용하여 계곡을 건너면서 50km 에 걸쳐 황무지를 꾸불꾸불 흘러갔다.
퐁뒤가르를 건설하는 데는 인근 채석장에서 캐낸 석회암 21,000m2가 필요했다. 이 다리는 모든 기초 부분이 바위 속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강물이 갑자기 불어나도 끄떡없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퐁뒤가르는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특히 라블레와 루소, 스탕달, 뒤마, 메리메 등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들이 이 다리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묘사하였다. 이 다리는 건설된 지 2천 년이 넘었지만 보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카미유 클로델의 마지막
퐁뒤가르를 방문한 나는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아비뇽으로 가는 길에 한 여성 예술가의 무덤에 꽃 한 송이를 바치기로 했다. 천재적인 조각가였으나 연인에게서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30년 동안 정 신병원에 갇혀 있다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그는, 아비뇽 남동쪽에 있는 몽파베(Montfavet) 마을의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오귀스트 로댕은 1884년 카미유 클로델을 조수로 받아 <지옥문〉과〈칼레의 시민들〉을 함께 작업하면서 그가 조각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곧 연인이 되었고, 서로에게 예술적 영감을 받아 1886년부터 1888년까지 카미유 클로델은〈사쿤탈라〉를, 로댕은〈입맞춤〉과〈영원한 우상〉을 조각했다. 하지만 로댕은 힘들었던 시절을 함께했던 로즈 뵈레를 떠날 수 없었다.
카미유 클로델은 조각에 온 힘을 쏟으면서 매년 이름난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하여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다양한 재료(테라코타, 석고, 청동, 대리석, 줄무늬마노)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대담한 작품을 만들었다.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되풀이하는 그들의 관계는 무려 1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카미유 클로델 조각 작품 <중년>
그러다〈중년〉을 조각하면서 두 사람은 완전히 결별한다. 로댕이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반면 카미유 클로델은 천천히 자신을 파괴하기 시작한다.
로댕의 학생이나 제자로 불리는 것을 거부했던 그는 1905년 드디어 으젠 블로 갤러리에서 전시한 작품으로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는다. 하지만 예술적 영감은 서서히 고갈되어 간다.
〈니오베〉라는 작품을 1905년에 마지막으로 조각한 이후로는 국가나 수집가들이 작품을 주문하지 않아 빈곤에 시달리게 된다. 게다가 건강이 점점 더 나빠지면서 정신착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기를 박해한다고 주장하고, 특히 로댕이 자신의 대리석 작품을 훔쳐 갔다며 의심하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던 동생 폴 클로델과도 멀어졌다. 이런 일들이 겹치고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면서 그는 점점 더 사회에서 멀어져 고립되어 갔다.
그나마 자신을 감싸주던 아버지가 1913년 세상을 떠나자 1주일 뒤, 가족들은 그를 정신분열증으로 파리 동쪽 벨에으바르 정신병원으로 보냈고, 1914년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아비뇽 근처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30년 동안 어머니와 여동생은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다.
카미유 클로델은 1943년 10월 19일 일흔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며칠 뒤에 몽파베 묘지의 정신병자 구역에 매장되었다. 아무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의 무덤에는〈카미유클로델, 1864~1943〉이라는 묘비명만 달랑 적혀 있었다. 그가 살아서 느꼈을, 그리고 죽고 나서도 느끼고 있을 사무치는 고독에 내 뼈가 다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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