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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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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여덟번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13.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 1859-1891), <서커스(Le Cirque)>, 1891, 185.5 x 152.5cm, 5.

 

쇠라가 그린 <그랑드자트 섬에서의 어느 날 오후>는 높이가 207센티에 폭이 308센티나 되는 큰 그림이다. 조르주 쇠라는 일부러 이렇게 큰 그림을 그렸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폴 시냑과 함께 주도하는 미술운동인 신인상주의를 널리 알리는 일종의 선언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운동은 과학이라는 수단에 의해 인상주의와 구분되고자 하였다. 모네나 르누아르가 시도했던 것처럼 경험적인 방법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셀-으젠 슈브뢰이의 대비색 이론에 따라 색을 지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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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그랑드자트 섬에서의 어느 날 오후> 

1839, 이 학자는 <색의 조화와 대비의 법칙>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두 가지 색이 살짝 포개져 있거나 매우 가깝게 붙어 있다고 치자. 만일 우리 눈이 멀리서 이 색들을 보면 원래의 색이 아닌 제 3의 색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빨간색과 파란색을 병치하면 우리 눈에는 녹색으로 보인다. 즉 우리 눈의 망막에서 광학적 혼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인상주의자들은 이 이론에서 자기들의 기법을 만들어냈다. 즉 대비색 이론에 따라, 인상파 화가들처럼 색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매우 짧은 터치로 점을 찍어서 대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점묘법이라고 부르는 기법이다.

쇠라는 자신이 사용한 이 기법이 보는 사람을 더 잘 설득할 수 있도록 <그랑드자트 섬에서의 어느 날 오후>를 크게 그리기로 했다. 그는 1884년에 열린 앵데팡당전에 <아니에르에서의 해수욕>을 전시하고 나서 곧바로 이 작품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들레르는 글로, 마네는 그림으로 표현한 현대적 주제를 선택했다. 파리 북쪽의 뇌이으와 쿠르브부아 사이를 흐르는 센 강 한가운데에는 그랑드자트라는 섬이 있다. 이 당시 파리지앵들은 주말이 되면 이 섬에 와서 산책도 하고, 수영도 하고, 요트도 타고, 사람도 만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실크해트를 쓴 부르주아지와 캡을 쓴 노동자, 연인들, 아이 어머니, 어린아이, 군인들, 세련된 부부 등 다양한 인간들이 이 공간에서 만난다. 쇠라는 주제의 현대성(카이유보트와 드가도 같은 시기에 이 도시생활이라는 주제를 표현하였다)을 분할화법의 현대성과 결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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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 <서커스> 

2년 동안 그는 30여 점의 밑그림을 그리고 이 밑그림에 다시 색을 칠하면서 <그랑드자트 섬에서의 어느 날 오후>를 그려나갔고, 결국 1886 5월 마지막 인상파전인 제 8회 인상파전에 선보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는 달리 이 작품은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고, 아무도 이 작품을 사지 않았다. 그로부터 5년 뒤 쇠라가 죽자 이 작품은 그의 어머니에 이어 그의 동생에게 넘어갔고, 동생 에밀은 1900년에 그걸 팔았다. 이 작품이 1924 2만 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의 수집가들에게 팔렸을 때 프랑스의 예술계에서는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

그리하여 이 현대예술의 걸작은 카이유보트의 <파리의 거리, 비 오는 날씨>라든가 피카소의 <나이든 기타리스트>, 모네의 인상파 작품들과 함께 미국의 시카고 미술관에 걸려 있게 되었다.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서커스> 1891년 불과 서른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쇠라의 유작이지만, 그가 죽고 난 후 앵데팡당전에 출품되었다. 이 작품은 기하학 법칙, 선과 색의 대응, 최대한 조화를 이루기 위한 보색의 사용 등  쇠라가 내세우는 이론을 완벽하게 적용한 작품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쇠라는 이 서커스라는 주제를 훨씬 더 자연주의적으로 다룬 드가나 툴루즈-로트렉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과학과 예술을 뒤섞은 것이다.

 

14.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 <아름다운 앙젤(La Belle Angèle)>, 1889, 92 x 73 cm, 5, 30번 전시실.

 

19세기 말,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매혹적인 마을 퐁타벤은 새로움을 찾는 예술가 집단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매우 강한 성격의 소유자인 폴 고갱을 중심으로 모인 그들에게 브르타뉴 지방은 세계로 열린 창이나 마찬가지였다.

1880년대 말, 고갱은 더 시적이고 성스러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인상주의를 완전히 버린다. 그는 인류의 기원으로, 대지의 순수함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더 한층 고립되어 있는 브르타뉴 지방이야말로 그에게는 시간을 초월한 땅으로 보였다.

고갱은 말한다. “나는 브르타뉴가 좋다. 여기서 나는 원시적인 것과 야생적인 것을 발견한다. 내가 신은 나막신이 이 화강암 위에서 울리면, 나는 내가 그림에서 찾는 둔하고 무디고 우렁찬 소리를 듣는다.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이 브르타뉴 마을은 그 당시 주민이 1,500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유롭게 주제를 선택하고, 또 그것을 자유로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 퐁타벤으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이들은 브르타뉴의 전통과 풍경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일을 하는 농민들을 자주 그렸다.

이 작은 마을의 화가들은 일본판화와 중세예술에서 영감을 얻고, 평평한 형태를 선호했으며, 전통적인 원근법을 버리고 중심 주제에 관심을 기울였고, 자유로움을 강조했다. 각자가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이 화파의 우두머리 격인 폴 고갱은 “모든 방법을 시도해보고, 모든 색을 과감하게 써보고, 자연을 찬양하고, 본질로 갈 수 있는” 권리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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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아름다운 앙젤> 

그리고 이 마을의 호텔 안주인들은 이들에게 바람직한 생활여건을 제공함으로써 “퐁타벤 화파”라고 불리는 이 예술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폴 고갱이 그린 <아름다운 앙젤>의 앙젤도 이 호텔 안주인들 중 한 사람이다.

1889년 퐁타방에 가서 앙젤이 운영하는 호텔 옆에 살았던 폴 고갱은 이 지역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나 있던 이 21세의 젊은 여성을 그리기로 결심한다.

앙젤은 나중에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고갱은 내 초상화를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얘기를 우리 남편에게 자주 했고, 결국은 그걸 그리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그가 초상화를 다 그렸다며  보여주었을 때 나는 ‘아니, 이 그림은 너무 보기 흉해서 도저히 봐줄 수가 없군요!’라고 소리쳤어요. 그러자 폴 고갱은 무척 실망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림을 도로 가져갔지요.

하지만 앙젤이 이런 반응을 보인 건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폴 고갱은 “모든 걸 시도해보기로” 결심하고 원근법과 공간의 통일성이라는 전통을 따르지 않기로 한다. 그는 일본판화의 기법을 본 따서 장식적인 배경에 앙젤리크의 초상화를 원 속에 집어넣는다. 클루아조니슴의 기법을 사용한 것이다. 또 그림 왼쪽에 “아름다운 앙젤”이라는 그림 제목을 써넣고, 그 위에는 인간의 형체를 한 우상을 그려 넣었다.

앙젤은 이 작품을 거부했지만, 에드가 드가는 여러 가지 형태들을 단순화하여 조합한 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보고 곧 바로 사들였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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