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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큐 맘, 지니의 단상> 예술과 인간의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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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일주일에 한번 눈을 디디는 <파리광장>에서는 무엇보다 도시의 예술성이 느껴졌다

물론 정치나 과학에 관련된 기사들도 눈에 들어오지만, 페이지마다 느껴지는 향기는 역시 파리의 고유한 예술적 향기였다

매회 차에 실리는 전시회 일정이나 작가와의 인터뷰 기사 등은 예술의 도시 파리를 한번 더 동경하게 만들었다.

지금은 빛 바랜 기억이지만 결혼 전 파리 피카소 박물관에 들렀던 적이 있었다

난해한 작품을 그저 그의 비이성적 사고로 돌려버렸던 나의 예술에 대한 문외한적 관점들이 이젠 부끄럽기까지하다. 

무수한 이야기들과 끝없는 영혼의 외침들을 한 폭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는다는건 

한줄로 일축되는 단편적 지식들의 무게와는 다른 것임을

얄팍한 나의 시선에는 한 폭의 그림이지만, 작가가 시사하는 이야기는 하나의 소우주를 담고 있음을 이제서야 하나씩 이해하게 된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을 이성적 영역(학문), 의지의 영역(종교), 욕망의 영역(예술)으로 바라보았다

선의 이데아를 추구했던 플라톤에게 가장 중요한건 진리였고, 

의지를 통해 욕망을 억누르고 이성적 판단의 진리를 실현하는 인간만이 훌륭한 인간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이란 늘 이성이나 의지의 빈틈 만을 바라보며, 

언제든 비집고 올라와 제압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떼쟁이 막둥이 같은 존재이다


칸트는 이성()을 다룬 순수이성 비판, 의지()를 다룬 실천 이성 비판을 출간한 후, 

어느 전시회의 작품 앞에서 무아지경이 된 한 사람을 보고 

인간의 욕망()을 다룬 판단력 비판을 출간하게 되었다고 한다


플라톤의 눈 밖에 있었던 욕망의 영역에 감각적, 도적적, 미적 판단의 개념을 부여해 

나머지 이성과 의지의 영역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의 존재로 보편화 시켰다.


지극히 나의 주관적 견해를 밝히자면 난 욕망이 1번이라고 생각한다

욕망이 없는 인간에게는 의지도 이성도 필요 없다고 생각된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욕망을 윤리적 범주 안에서 잘 쓰기 위해 

의지와 이성이 필요했고, 욕망이라는 천진난만한 아가를 보살피기 위해 

의지와 이성이라는 책임감 있는 보호자가 나타나 상호 간의 삼위일체 구도를 구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의지는 보편화 될 수 있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은 개별적 특수성을 지닌 구체적인거다

예술은 개별적 욕망의 미학적 돌파구이고, 예술가는 침묵하고 있는 욕망의 대변인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결핍과 아픔에 더 민감하다

늘 내게 큰 화두는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자기실현을 꿈꾸는 백 프로 순도의 신에 가까운 인간이 아니라, 균형이 깨지면 늘 아프고 울부짖을 수 있는 나약하지만

소중한 존재로서의 인간

예술이야말로 나약한 인간이 신의 가르침에 순수히 따를 수 있는 자기고양의 필연적 단계라고 생각된다.


이 세상은 개별적 욕망이 얽히고 섥혀 갈등하고 아파한다

파리의 구석구석에는 온통 그러한 표상들이 드러난다

보편화된 지성의 이면에 숨겨진 욕망의 모습들이 파리 안에서는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파리를 다녀온 지 20년이 지났다

여행이 끝나고 드골 공항으로 향하면서 언젠가 다시 올 거라 약속했지만, 아직 지키지 못한 약속으로 남아있다

<파리광장>을 통해 바라본 파리는 나의 잊혀진 약속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다.


<땡큐 맘, 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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