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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주 칼럼> 부르고뉴 와인, 그리고 만남에 대한 짧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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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선주 (한국와인협회 부르고뉴 지부장, 디종한글학교장)


아일랜드가 낳은 시대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 율리시즈 »다. 주인공 레오폴 블룸은 우울하게 내린 회색빛의 더블린 하루를 푸념하며 이야기 한다. 그는 부르고뉴 한 잔을 들이키며 « 방금 마신 와인이 입에서 환한 태양을 가득 전해주려고 하네. »라고 이야기한다. 블룸은 부르고뉴 한 잔을 마시며 시간의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다. « 무언가를 생각나게 하는 비밀스러운 애무 »의 깊은 내면의식 속으로 침잠케 하는 부르고뉴 한 잔.

제2차 세계대전 후부터 부르고뉴 포도밭 면적과 생산량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1980년대 1ha당 45헥토리터 상한선을 넘지 않던 수확량이 2002년에는 58헥토리터에 달했다. 좋은 묘목을 고르고, 병충해 방지, 포도 재배 방법 개선, 포도밭 보호를 위한 엄격한 규제를 도입한 결과였다. 또한 고급 품질의 AOC 와인이 꾸준이 증가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지난 20년 동안 프랑스 와인의 퀄러티 향상으로 ‘제한지역 생산 우수와인’(Vin de Qualité Produit dans une Région Déterminée, V.Q.P.R.D.)과 AOC 와인이 증가하였다. 상대적으로 ‘벵 드 따블’(Vin de table) 생산은 급격히 줄고 있다.

이러한 프랑스 와인의 퀄러티 향상과 생산량 증가에도 불구하고 부르고뉴 와인은 이제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대 »가 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도 불만을 토로할 정도로 부르고뉴 와인의 가격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급등하였다. 이는 프랑스 와인 전반적으로 국제 시장이 확대된 데 그 이유가 있다. 생산량은 한정되어 있고 소비는 기하급수적으로 느니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자본주의 시장원리를 부르고뉴 와인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거품으로 인해서 진정한 부르고뉴 와인을 참맛을 느낄 기회가 줄고 있다는 점이다. 전세계적으로 와인 생산량이 증가, 1인당 와인 소비량 감소, 경쟁자들의 증가, 다양한 소비 경향이 와인 소비 시장에도 나타나고 있다. 선택의 폭은 넓고 진정한 매니아가 아니면 부르고뉴 와인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디종에 와서 산지 25년, 붙박이로 부르고뉴에 살았다. 와인을 배운 게 부르고뉴였고, 아직도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와인은 부르고뉴밖에 없다. 그런데, 이렇게 부르고뉴에 지조를 지키자니 적지 않아 경제적 출혈이 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친구들, 지인들을 통해 좋은 와인을 싼 가격에 ‘야매’로 구입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게 된다. 어제도 갑자기 들이닥친 친구와 도멘 드니-모르테의 프르미에 크뤼 라보 셍 작 2007년과 부르고뉴, 도멘 루 뒤몽의 피쌍 2012 세 병을 열며 와인에 대한 수다와 수다를 거듭했다. 라보 셍 작은 프르미에 크뤼지만 샹베르텡이나 클로-드-베즈 같은 그랑 크뤼에도 밀리지 않는다는 평이 대세다. 1930년 부르고뉴 와인의 등급을 정했을 때, 샹베르텡 그랑 크뤼나 클로-드-베즈 그랑 크뤼처럼 워낙 탄탄한 그랑 크뤼들이 포진해 있는 즈브레-샹베르텡의 포도밭들과는 달리 북동쪽으로 올라간 경사면에 위치한 밭들은 프르미에 크뤼 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마실 때마다 샹베르텡과 전혀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이거나 오히려 섣부른 샹베르텡 그랑 크뤼보다 낫다는 느낌까지 받곤했다. 부르고뉴 와인은 마치 소개팅이나 선보러 나가는 자리 같을 때가 많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이러저러한 기준과 등급에 의해 분류된 사람들을 매칭해서 만나게 하고, 그래서 이러저러한 선입견과 생각을 가지고 호텔 커피숍에 앉아 상대를 기다리게 된다. 그리고 마주 앉은 사람에 대해 분류와 등급을 생각해 적당한 대화를 하고, ‘간을 보는’ 시간을 갖고, 짧은 시간 안에 어떠어떠한 카테고리 안에서 사람을 평가하고 맛을 보고. 그랑 크뤼인줄 알았는데 가보니 프르미에 크뤼보다 못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프르미에 크뤼 딱지를 달고 있지만 그랑 크뤼보다 나은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한 병, 한 병 열 때마다 다른 와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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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색이 아주 진하고 향도 아주 진하다. 카시스 열매, 또다른 작고 검붉은 베리류의 향들이 연상된다. 사향과 동물 털, 그리고 숙성되었을 때는 감초 향도 난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사향냄새가 진해지고 색은 거의 갈색에 가까운 루비빛에 가까워졌다. 강하고 묵직한게 손 씻고 마음 바꾼 조폭 같은 느낌이 나던 와인은 에로 배우 이미지를 벗은 성숙미 물씬 나는 중년 여배우에 가까워졌다. 중성의 맛이 교차하는 느낌은 마치 남자역을 맡은 레즈비언의 모습이다. 이렇게 바뀌어가는 와인들을 한 병, 한 병 마실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같은 에티켓을 하고 내가 만나게 되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관계에 대한 짧은 상념. 그 때, 그 공간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그 순간의 한 사람을 기억해내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그 관계가 2도쯤은 더 따뜻해지지 않을까. 긴 시간 동안 형성되는 한 개인의 성격을 짧은 시간내에 만나 이해해야 되는 건 얼마나 폭력적인가. 뿌리 깊은 나무의 밑둥을 절단해 그것으로 나무 전체를 보아야한다는 방식과 무엇이 다를까. 사람도 와인도 어떤 장소와 어떤 시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을.

어쩄든, 부르고뉴 와인은 생산자나 네고시앙의 경우에 따라 아뼬라시옹의 인증 등급을 낮출 수 있다. 예를 들어 샹베르땅 (AOC Grand Cru)의 경우 즈브레-샹베르텡 프르미에 크뤼나 즈브레-샹베르텡(AOC꼬뮈날), 부르고뉴 (AOC 레지오날)로 등급을 내릴 수 있다. 등급을 낮추는 것은 법률에 명시된 아뼬라시옹에 적합한 최소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했을 때다. 생산자나 네고시앙은 와인이 그 떼루아나 등급이 요구하는 정도의 품질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 등급을 내리는 정직함을 보여줌으로서 도멘과 생산자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아뻴라시옹을 섞었을 때는 어떤 경우라도 등급이 강등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본과 뽀마르, 샹베르텡과 끌로 드 부조를 섞었을 경우 아뻴라시옹 부르고뉴로만 판매될 수 있다. 그럴 일은 별로 없겠지만. 또한 생산자나 네고시앙은 이러한 와인을 샵탈리자시옹(설탕 첨가)을 하지 않았다는 조건으로 등급을 벵 드 따블(Vin de Table)로 낮추는 것을 I.N.A.O.에 요구할 수 있다.

와인의 세계도 결혼정보회사 세계처럼 냉혹하다. 어느 때건 분류와 등급에 맞지 않는 와인들은 가차없이 강등된다. 도멘 스스로 판단하여 자신의 도멘을 신뢰하는 거래처와 소비자를 위해 강등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 도멘 자크 프리외르에 갔을 때, 그랑 크뤼로 알고 있던 와인을 프르미에 크뤼로 강등한 경우를 봤다. 경제적 타격이 크고 언제 다시 그랑 크뤼로 회복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강등을 감행한 것은 매우 용기있는 처사같아 보였다. 다양한 이유로 와인 퀄러티에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지만 도멘에서 강등을 스스로 신청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볼네, 클로 데 상트노 프르미에 크뤼 2011은 Volnay, Clos des Santenots 1er Cru 2011 (monopole)은 이렇게 프르미에 딱지를 떼고 포도나무를 바꾸게 된다.

마셔보지도 않고 와인을 구매하는 것은 자보지도 않고 결혼을 감행하는 것과 같다고 한 프랑스 소믈리에 친구가 이야기해 얼마나 놀랐던지. 그렇게 데귀스타시옹을 하고 났어도 구매한 한 병, 한 병이 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을 놀래킨다. 마치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날은 이런 모습, 저런 날은 저런 모습인 것처럼. 그럴 때, « 속았어...속았어 » 외칠 일은 아니다. 변해야만 하는 것은 와인이나 사람이나 숙명 아닌가.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그때마다 «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하며 그 시간을 즐겨보기로 한다. « 내가 나를 모르고 », « 내 안에 너무 많은 내가 있는데 » 말이다. 그래서 폼잡지 말고, 각 세우지 말고, 힘 빼고 살기로 한다. 그냥, 이 순간, 이 공간에서 최대한 내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말이다. 

부르고뉴 와인에 혹은 사람에게 속았다 생각들 때 권해본다. 짐 모리슨의 소울 키친.

자, 이제 문 닫을 시간이야/돌아가야겠군/밤새도록 여기 있고 싶어/자동차로 스쳐가는 녀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고/가로등은 희미한 불빛을 뿌려대고/게다가 네 머릿속은/완전히 맛이 간 것 같군/이제 살 수 있는 곳이라야/빤하잖아/너의 소울 키친에서 하룻밤 재워줘/그 아늑한 스토브로 따스하게 만들어줘/ (짐 모리슨, 소울 키친)


<노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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