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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빠삐옹> ‘’인생을 낭비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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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광장편집부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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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한 사막 위를 걷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강렬한 태양 아래 그가 향하는 저 멀리 지평선에, 길게 무리지어 있는 일군의 사람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중 한 가운데 빨간 망토를 두르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서 있던 한 남자가 이 쪽을 향해 걸어오는 그에게 갑자기 소리지른다.

"네 죄명을 알겠나?"

곧 쓰러질것처럼 흐리멍텅하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돌변한다.

"전 결백합니다! 죽이지 않았어요. 증거도 없이 뒤집어 씌운겁니다." 라고 항변하듯 외친다.

그러자  빨간 망토의 사나이도,

"그건 사실이다. 넌 살인과는 상관없어." 라고 수긍한다.

"그럼...무슨 죄로...?" 그가 물어본다.

빨간 망토는 대답한다.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그를 똑바로 가리키며 ,

"널 기소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로!"

빨간 망토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흔들리며 아래로 떨어진다.

"벌은 사형이다!"

그는 체념한 듯 뒤돌아서 사막 너머로 사라져간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유죄, 유죄, 유죄......

 

이것은 영화 '빠삐용'의 한 장면이다.

빠삐용( 스티브 맥퀸)은 살인 누명을 쓰고 악명높은 프랑스령 기아나 섬에 수감된다. 그는 감옥에서 만난 친구 드가(더스틴 호프먼)를 때리던 간수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붓고 도망치다 잡혀 독방에 갇히게 된다. 벌레가 빠져 있다면 그게 유일한 건더기일만큼 희멀거한 죽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에게 어느 날부터 드가가 간수 하나를 매수해 넣어주는 코코넛이 반쪽씩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이내 그 사실이 발각되어 그나마 식사도 반으로 줄고 햇빛도 6개월동안 차단되는 벌을 받는다. 배가 너무 고파 감방 안에 사는 온갖 벌레를 잡아 먹어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보지만 그의 몸과 정신은 점점 피폐해져만 간다. 그는 그렇게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이 때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장면속에서 빠삐용은 자신이, 살인죄가 아닌 다른 중죄를 저지르고 살았음을 깨닫게 된다.

인생을 낭비한 죄, 도대체 그게 뭘까? 인생을 낭비한다는 게 뭘까? 그는 왜, 그동안 어떻게 살았길래 어떠한 저항조차 하지 않고 순순히 그 죄를 받아들인걸까? 그리고 설사 낭비했다한들 그것이 왜, 그리고 어떻게 죄가 된단 말인가? 그러나 영화는 지나온 그의 삶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를 지켜볼 뿐이다.

간수장은 빠삐용에게 코코넛을 넣어준 사람의 이름만 대면 식사를 다시 정상적으로 주겠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드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극적으로 2년간의 독방형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일반 감옥으로 돌아온 빠삐용은 기력을 회복하자마자 계획을 세워 드가와 또 다른 죄수 한명과 탈옥을 감행한다.

작은 뗏목을 타고 험난한 파도와 사투를 벌이며 겨우 힘겹게 온두라스 섬에 도착한듯 보였으나, 죄수를 데리고 해안가를 지나던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드가는 그 자리에서 잡히고 빠삐용은 숲으로 도주한다. 총을 쏘며 뒤쫓는 경찰들을 피해 도망치다 절벽에서 떨어지며 그는 정신을 잃고 물 속에 빠지지만 온두라스 섬 원주민 부족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어, 그들의 보살핌으로 빠르게 건강을 회복한다. 족장의 가슴에 나비(빠삐용)문신-자신의 가슴에 있는것과 같은-을 그려주고 받은 진주알을 갖고 빠삐용은 마을을 떠난다. 그러나 경비대의 눈길을 피해 숨어든 수녀원에서 수녀원장이 부른 경찰에 의해 결국 잡히게 되고 그는 또 다시 5년동안 독방에 수감되게 된다.

5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는 독방에서 나오게 되지만 다시 일명 악마의 섬이라 불리는 곳으로 보내진다. 이 섬은 거친 파도와 상어떼가 있어 도망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곳이지만, 순응만 하고 살면 얼마든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빠삐용은 그곳에서 이미 먼저 잡혀 와 살고있는 드가와 재회하게 된다. 그도, 드가도 이제 어느덧 초로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드가는 텃밭에 농작물과 채소를 심고 닭과 개, 돼지들을 키워가며 살고 있었다. 이제 드가는 빠삐용과 함께 감옥을 뛰쳐나왔던 예전의 드가가 더 이상 아니었다. 그는 제한적이지만 나름 이 곳에 잘 적응을 하며 살고 있었다. 이 섬은 벗어나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먹고 사는 문제는 걱정이 없을만큼 꽤 괜찮은 곳이다.

그렇다. 남은 여생을 드가와 함께 여기서 편안하게 산다해도 그리 나쁠건 없을것이다. 어차피 이 곳을 탈출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나...빠삐용은 이 곳의 삶을 선택하지 않는다.

코코넛 자루 하나에 몸을 맡긴 채, 집어삼킬 것 같은 시커먼 바다속으로 빠삐용은 몸을 던진다.

그런 빠삐용을 바라보며 드가는 눈시울을 적신다. 그러나 그는 금새 뒤돌아서 자신이 왔던 곳, 익숙해진 그 곳, 자유 대신 그가 선택한 안전함이 기다리는 그 곳으로 돌아간다.

 

왜 그랬을까?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결국 다시 잡혀들어 왔는데... 왜 그는 계속해서 탈출을 시도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독방에서 죽음 앞에까지 갔을 때 그 빨간 망토가 자신에게 했던 그 말들이 그에게 강박적으로 작용한 것일까

그리하여 그는 또 다시 인생을 낭비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것일까? 그에게 인생을 낭비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면 낭비하지 않은 인생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묻는다

인간에게 있어 진정 살아있다는 건 무엇일까?

태양이 작렬한다. 바다 한 가운데 코코넛자루 하나가 스티로폴 조각처럼 무기력하게 떠있다. 그리고 그 위에 빠삐용이 있다. 갑자기 그가 하늘을 향해 소리친다.

"이 자식들아, 난 이렇게 살아있다아아아!"

끝이 보이지 않는 망망대해에 점처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무인도처럼, 그는 이 상태에서 영원히 머물러 있게 될 지도 모르는데 그는 악에 받친듯 그렇게 라도 자유로이 살아있음을 증명하려 했다

 

영화 마지막에 나레이션이 흘러나온다.

'빠삐용은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여생을 자유의 몸으로 살았다. 악명 높은 기아나의 감옥도 그를 굴복시키진 못했다...'

그는 편안한 미래를 보장해 줄 무언가를 기다려서가 아닌 그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고 오직 자신만의 선택으로 자유를 얻게 된 바로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인생을 낭비하지 않은, 진정 살아있는 순간임을 보여준다.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만들어지는 세상과 틀 속에 안주해 살면 안전하고 편할 순 있지만 참으로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순 없을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해서 책임을 지며 살아갈 때, 우리는 인생이

 주는 고난과 어려움,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나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삶의 순간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채워가는 사람에게 그 길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크게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파리광장 / 박은진 penseur10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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