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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성인’에 추대된 테레사 수녀 : Sainte Teresa de Calcut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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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13 06:01 조회 1,969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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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어머니그러나 또 다른 얼굴 -

일생을 빈자를 돌보는데 투신한 테레사 수녀(mère Teresa), 2003년 10 19일 복자 추대(Béatification)에 이어 지난 4바티칸 성베드로 광장(Saint-Pierre à Rome)에서 시성식(Canonisation)을 통해 성자(sainte Teresa de Calcutta)로 추대(Canonisation)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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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자의 성녀라 불리며 일생 동안 극빈자를 돌본 공로로 ‘복자에 오른 테레사 수녀(mère Teresa). 그가 지난 4일 바티칸에서 성자에 추대됐다. 카톨릭 성인이 되기 위해 거쳐야할 까다로운 절차와 증명은 인구에 회자되어 온 테레사 수녀의 대중적 지지와 교황의 배려, 그리고 기적으로 인정받은 사건 등을 통해 신속하게 진행, 이례적으로 선종 19(1997 9 5, 87세 인도의 칼쿠타, Calcutta, 에서 별세) 만에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사업가의 딸에서 신의 종으로

테레사 수녀는1910 8 26안녜즈 곤제 보야지우(Anjezë Gonxhe Bojaxhiu)’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유고슬라비아에서 의약품 제조업 등 여러개의 사업체를 운영하던 알바니아인 사업가로 그는 당시 매우 부유했던 집안의 막내딸이었다. 1928 18세에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수녀회에 입회, 1937년 수녀로서 종신서원을 하면서 구도자의 길에 들어선다.

« 나의 소명은 사랑 »

1928 12월 그는 종교적 수련을 위해 인도의 칼쿠타(Calcutta)에 도착한 뒤 목격한 극도의 가난함에 큰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1948년 인도 국적을 취득한 그는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헌신하라는 소명을 받고 인도에 정착한다. 1952년 한 신도가 제공한 집을임종자의 집(Kaligat,칼리가트)’으로 이름 붙이고 문을 연다. 이에 앞서 그가 수녀회에서 가르치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랑의 선교회(Missionnaires de la Charité, 1950년 교황으로 부터 승인)’를 통해 죽음을 앞둔 빈자들과 고아가 된 그들의 자식을 돌보기 시작하며 본격적인 활동범위를 점차 넓혀갔다.

그는 일생을 신께 서원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을 자신의 봉사 방향으로 삼았다. 그들의 죽음으로 고아가 된 자녀들을 또한 돌보기 시작하면서 빈자의 어머니로서 낮은 곳에서 절망에 신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자선을 베풀었다.

197912 10.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테레사 수녀의 행적은 본격적으로 전 세계적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그는 «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고 신체에 장애가 있으며 눈이 멀고 질병에 걸려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도 받지 못하고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가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겠다 » 라는 수상소감을 밝혔다.

수상을 계기로 세계 각국에서 구호와 성금이 밀려오자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활동영역이 확대된다. 한센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을 설립하고 극빈자와 고아들을 위한 무료 급식소와 상담소, 학교 등을 세워 그의 소명, 사랑을 실천한다.

철저한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된 무지, 그리고 회의적인 시각

이에 반해, 테레사 수녀의 모습 이면의 진실에 대해 끊임없는 의문제기와 과오를 밝히려는 시도 역시 줄곧 이어졌다. 바티칸 내부 또한 성인 추대 과정에서 후보자의 과오를 조목조목 조사하고 밝히는 악마의 대변자(Advocatus Diaboli)가 그의 행적과 품성에 있어 회의적 의견을 다각도로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미국의 칼럼니스트로 책자비를 팔다의 저자,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의 구호활동 이면의 의혹을 가감없이 밝혀낸 대표적 무신론자다. 테레사 수녀의 성인 추대에 앞서 교황청에서 해당 인물을 검증하기 위해 선정하는 ‘악마의 대변인측으로부터 초빙. 테레사 수녀의 과오에 대해 낱낱이 지적했다.   

대표적으로 테레사 수녀가 운영했던 임종자의 집(Kaligat)’은 수많은 환자와 걸인들이 치료와 안식을 얻은 장소로 알려져 있으나 이 시설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했던 이들의 증언은 엇갈린다. 테레사 수녀가 시설을 개선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었고, 오히려 열악한 운영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주삿바늘을 찬물에 씻어 재활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으며, 특히 중환자와 가벼운 증상의 환자 구분, 남녀 구분 따로 없이 일괄 수용하면서 제대로 된 치료나 보살핌을 받으면 나을 수 있는 사람들이 그저 몇 달, 몇 년간 누워만 있다가 죽어갔다는 고백 등이다.

이는 테레사 수녀의 확고한 신념, « 가난과 고통은 하느님의 축복 » 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 일들로 이해된다. 때문에, 세계 각지에서 이어지는 후원과 구호물품을 통해 시설을 개축하고 현대화된 의료장비를 갖추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사실은 테레사 수녀의 명성과 극단적 대비를 이룬다. 무엇보다 의학상식에 기반을 두고 행해졌어야할 구호활동이, 종교적 믿음과 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동정심을 앞세운 ‘선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만 매진된 것이다. 이렇게 방치되다시피한 환경에서 죽어가는 환자들과 그의비현실적이기 조차한역사적 구호활동은 마치 빛과 그림자처럼 극명하게 분리된다.

테레사 수녀는 또한 엄격한 카톨릭 교리를 이유로 강간 피해 여성의 출산을 권장한 일과 독재정권하에 고통받는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에게 무조건적 인내를 권한 일 등을 통해 당시 흑인 인권 운동가 맬컴 엑스로부터 « 종교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착취와 차별로 얼룩진 아프리카 원주민을 순한 양처럼 반항하지 못하게 만든 점 » 이라는 우회적 비판을 받은 바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빈자와 함께했던, 자비와 긍휼 그 자체였던 테레사 수녀의 일생을 아무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는 일생을 병자를 돌보느라 허리를 굽혀 생활한 탓에 허리가 완전히 굽어 버렸고, 2차 심장발작 이후에도 병자를 돌보려다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고통의 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한 시대를 품은어머니임에는 틀림없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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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 데레사님의 댓글

소화 데레사 작성일

너무 좋은 글들이 많네요. 재밌고 많이 배우고 갑니다. 종종 들를테니, 앞으로 더 좋은 글 많이 많이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