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김영필 교수의 세상 읽기] - “뵈닉하우젠 탑으로 불릴 뻔한 에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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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11-04 01:39 조회 161 댓글 0본문

‘수도 한가운데의 발기’, ‘흉측한 괴물’.
에펠탑 건축 당시 예술가들의 불평이다. 에펠탑을 미학적으로만 바라보기엔 곤혹스 럽다. 더구나 민낯을 드러내는 낮엔 더 그렇다. 그저 기능주의적으로 보면 장대하다. 오죽 보기가 민망했으면 모파상이 에펠탑이 유일하게 보이지 않는 탑 내부 식당의 단골손님이 되었을까? 이 구조물은 1889년 프랑스 대혁명 100주년을 기념한다는 명분으로, 그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철재로 높이 쌓아 올린 거미집 건물이다. 에펠탑은 250만 개의 리벳이 정확한 위치에 고정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정교한 철 구조물의 완전체이다. 기능주의적 측면에서 당시로서는 완벽한 구조물이다. 당시 파리 대부 분의 건물이 석조 건물인데, 유독 이 구조물만 철골이다.
당시 영국의 철강 산업에 대한 프랑스의 콤플렉스는 심각했다. 철강 산업은 영국에 비해, 반세기나 뒤떨어졌다. 영국이 세계 최초의 만국박람회를 성공적으로 치러 낸 것이 1851년이었는데, 당시 프 랑스는 제2공화정의 연속된 정치적 실패로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이 콤플렉스를 치유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세계 만국박람회의 개최였다. 하지만 1855 년과 1867년에 개최한 만국박람회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제3공화국 때인 1878년의 박람회 역시 콤플렉스를 극복하기엔 힘이 부쳤다. 1889년의 박람회 때 에펠탑의 건축으로 이 콤플렉스는 치유된다.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 1832 1923)에 의해 세워진 이 철 구조물은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될 예정이었다. 에펠탑이 뵈닉하우젠(Bönickhausen)탑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귀스타브 에펠의 고조 할아버지인 독일인 장르네 뵈닉하우젠이 18세기 초 파리에 정착하면서 프랑스식 이름인 에펠로 개명하였기 때문에 에펠탑이 된 것이다. 에펠은 1832년 12월 15일에 태어났다. 에펠이 철의 마법사로 성장하게 된 계기는 1855년 대학 졸업 후 처남이 운영하는 주철 공장에 무보수 도제로 들어가면서이다. 철도 교량 건설 현장의 책임자로 성장하면서 에펠탑을 건축하는 데 필요한 기량을 닦아 왔다.
1867 년 두 번째 만국박람회 전시관 철골 아치 건축에 참여하였고, 1867년과 1878년으로 이어지는 박람회를 거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더 높아진다. 그가 에펠탑을 세우기 10년 전에 이미 프랑스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을 정도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는 이후 경제적으로 부흥된 모습을 세계박람회를 통해 알리고 싶었다. 경제 부흥이란 관점에서 에펠탑은 당시 산업부장관이자 1889년 만국박람회 조직위원장이었던 에두아르 로크루아의 1000피트 높이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다. 1909년에 철거될 위기에 처했지만, 송신기를 세우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철거를 모면한 건물이다. 대부분의 시민이 파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구조물이라는 이유로 에펠탑이 세워질 때부터 반대했다. 송신탑이라는 기능적 명분으로 겨우 유지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 탑은 독일에게 프랑스인의 자존심인 베르사유 궁전을 내 주어야 했던 굴욕을 치유하기 위해 세워진, 프랑스인들에겐 치유의 공간이다. 파리의 웅장한 건물들은 대부분 1855년부터 거의 11 년마다 열린 세계박람회 때 지어진 것들이다. 그 출생이 파리를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세우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다.
<김영필 교수>

아시아대학교 교수와 대구
교육대학교 연구교수 역임.
철학박사(전공 서양철학 중
현상학). 저서로는 ‘여행, 인문에 담다(2020)’ , ‘욕망으로
성찰한 조선의 공간(2021:
한국출판문화진흥원 우수출판콘텐츠 선정작)’, ‘신천에 철학 카페를 짓다(20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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