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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커피와 까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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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6-24 04:56 조회 27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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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프로코프> 까페 전경


카페와 카페에서 파는 커피가 없으면 프랑스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대부분의 프랑스 사람들은 아침식사 때 커다란 사발에 우유 넣은 커피를 들이마신다. 그리고 밀려드는 잠을 쫓기 위해 그냥 에스프레소만 한 잔 홀 짝 입 속에 털어넣는 사람도 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바에서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만들어낸 이 블랙커피를 한 잔씩 마신다. 매일 아침 집 앞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고 일을 나가는 사람도 많다. 이 정도면 커피야말로 프랑스 사람들의 삶의 일부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커피 상표들이 프랑스 시장에서 점점 더 큰 성공을 거두고 있는 아라비카 품종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미식가들은 매우 다양하고 특별한 커피들을 발견했다. 수공업적으로 이루어지는 소규모 로스팅은 단일 산지에서 생산된 커피나 복잡하게 블렌딩한 커피를 제공하고 있다. 그 외에도 식사가 끝난 뒤 고객들에게 맛이 진한 모카커피에서부터 카페인 함유량이 적은 브라질 커피, 신맛이 강한 케냐 커피, 특이한 맛의 말라바 커피, 자마이카의 블루마운틴 커피, 혹은 멕시코나 과테말라의 전설적인 마라고지 커피, 그리고 살짝 산미가 느껴지는 컬럼비아 커피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커피로 메뉴를 제공하는 식당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1702년에 시칠리아 출신의 프로코피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파리에 카페를 열었고, 이 카페는 곧 <프로코프 >라는 이름을 갖게 되면서 볼테르나 디드 로, 루소 같은 철학자들에 이어 처음에는 벤자민 프랭클린이나 제퍼슨 등의 미국인, 그러고 나서는 당통이나 마라 같은 프랑스 혁명가들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그 후에 식당으로 바뀐 이 카페에는 지금도 예술가들과 문인들이 모여든다. 18세기 말에 커피에는 모두 3천여 개의 카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프로코프 카페와 라페 카페는 지금도 남아 있다. 


카페는 곧 소문과 소식을 퍼트리는 중심지가 되었다. 카페가 정보를 전파하는 중심지였으므로 자연스럽게 지적 토론이 왕성하게 벌어졌다. 카페에서는 꼭 신사나 부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말을 할 권리를 갖고 있다. 그 래서 발자크는 “카페의 카운터는 인민의 의회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의 카페들은 만남과 대화의 장이 되었다.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며 지적, 정치적 토론을 벌이게 된 것이다. 대부분 화려하게 장식된 카페들이 단지 커피만 마시는 장소는 아니었다. 카페에서는 사람들이 종교와 정치, 예술 등 모든 분야에 대해 토론하고 서로 논의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이런 분위기에서 그들의 철학을 널리 퍼트릴 수 있었다. 


카페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퍼져나간 계몽철학은 두가지 중요한 혁명, 즉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존 폴 존스와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등 미국의 식민지군들은 프로코프 카페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리고 토마스 제퍼슨은 여기서 1758년에 미국헌법의 초안을 썼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철학자들 역시 카페를 빈번하게 출입하였다. 드니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에서 자기가 시국과 거리를 유지하며 라 레장스 카페에서 체스 게임을 구경하고 모든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고 말한다. 장-자크 루 소 역시 <고백록>에서 언제 어느 때라도 카페를 찾아갔다며 “볼테르는 깨어 있는 상태에서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매일 같이 하루에 커피를 40잔씩 마셨다”라고 쓴다. 또 몽테스키외는 <페르시아인들의 편지>에서 프로코프 카페에 대해 얘기하면서 “커피가 그걸 마시는 사람들에게 지적 능력을 부여할 수 있도록 끓여 내오는 카페가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카페와 커피는 계몽주의 철학자들 의 사상을 전파시키는 데 필요한 환경을 제공해 주었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계몽시대의 두 촉매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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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부세(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아침식사(Le déjeuner), 1739>


파리의 루브르 미술관 프랑스 회화 전시관에 가면 프랑수아 부세(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아침식사(Le déjeuner), 1739>라는 그림을 볼 수 있다. 프랑스는 루이 15세 통치하의 1740년대에 상업과 산업, 농업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면서 “태평성대”를 맞게 된다. 그 덕분에 서민들은 더 이상 먹을 걸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귀 족들과 부르주아지들은 사업이 번창하여 큰 돈을 벌게 되었다. <아침식사>는 부르주아지들이 이렇게 쌓아올린 경제력으로 새로운 생활 스타일을 추구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사기그릇과 대형 거울, 작은 벽난로, 로코코 스타일의 장식품, 간식, 어린아이들에 대한 배려, 그리고 커피와 차, 초콜릿 등의 뜨거운 음료는 그 같은 새로운 생활 스타일의 표현이다.


 18세기 전반, 파리에는 커피 판매원 조합이라는 단체가 있어서 여기 소속된 직원들이 은으로 된 커피 주전자를 각 가정으로 들고 가서 따라주었다. 그림에서 초록색 앞치마를 입고 있는 젊은 남성은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파리에서 뜨거운 음료를 각 가정으로 배달하는 것은 조금도 놀라 운 일이 아니었다. 차와 물, 빵, 달 걀, 우유를 파는 사람들이 “사세요!”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한바탕 훑고 지나가면 아침 9시쯤 커피를 파는 사람들이 주전자에 커피를 담아가지고 각 가정으로 올라온다. 프랑스 사람들은 18세기에 처음으로 아침 식사를 먹기 시작했고, 루이 15세는 아침에 커피나 초콜릿 같은 뜨거운 음료와 함께 빵을 먹은 최초의 왕이다. 음악 카페들은 뮤즈들에게 무대를 제공해 주었다. 많은 카페들이 전문화되어 어떤 카페에서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 아이스크림이나 샤베트를 맛볼 수 있게 되었고, 또 어떤 카페에서는 간단한 요리나 세련된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동네 카페가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은 아무 시간에나 동네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한 잔 마시거나 간단한 식사를 했다. 


<이재형 작가>


-이재형 작가와 함께하는 프랑스 문화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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