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민중의 교황‘, ‘가장 소외되고 약한 이들과 함께한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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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4-29 05:12 조회 71 댓글 0본문
프란치스코 교황 선종-로마서 장엄한 장례식 거행
가톨릭 교회의 첫 남미 출신 교황인 프란치스코(Le pape François)*가 폐렴으로 인한 입원 치료를 마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4월 21일, 부활절 월요일 오전 7시 35분(현지 시각), 바티칸 시내 성 마르타 관저에서 향년 88세로 선종했다. 12년간의 교황직을 마친 뒤다.
*교황의 경우 예외적으로 ‘프란치스코’ 가 공식 명칭으로 통일되어 사용됨.
1936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그는 1282년 만에 비유럽 출신이자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으로, 2013년 교황직에 선출됐다. 그는 '빈자의 성자'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교황명으로 선택하고, 청빈한 삶을 실천한 인물이다. 동성 커플에 대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을 허용하는 등 역대 가장 진보적인 교황으로 평가를 받았다.
장례 미사는 26일 토요일(현지 시각) 로마(Rome) 성 베드로 광장(la place Saint-Pierre)에서 장엄하게 거행됐다. 미사는 조반니 바티스타 레(Giovanni Battista Re) 추기경단장의 주례로,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목관을 성 베드로 성전에서 야외 제단으로 운구하면서 시작됐다. 바티칸에 따르면, 이날 미사에는 25만 명이 넘는 인파가 운집했으며,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을 포함해 엠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 등 약 50명의 국가원수 등,130여개국 대표단이 바티칸을 찾아 애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자리했으며, 두 정상은 장례식 후 비공식적인 만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장례 미사는 2시간 넘게 진행되었으며, 전 세계가 애도하는 가운데 엄숙하게 마무리되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에 약 40만 명의 인파가 몰리며 로마 전역이 깊은 애도에 잠겼다. 이탈리아 내무부 장관 마테오 피안테도시(Matteo Piantedosi,)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미사와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까지 이어진 행렬 경로를 따라 운집한 인원을 모두 합산해볼 때, 참석자는 최소 40만 명에 달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교황의 유언대로 성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가 아닌 ‘바티칸 외부에 안장’
미사 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관은 대부분 전임 교황이 묻힌 성 베드로 대성전 지하 묘지가 아닌, 그가 생전에 묻히기를 원했던 로마 중심부의 성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la basilique Sainte-Marie-Majeure)으로 이동했다. 교황이 바티칸 외부에 안장되는 것은 1903년 레오 13세 이후 122년 만이다. 관 속에는 고위 성직자의 책임과 권한을 상징하는 팔리움(pallium, 양털로 짠 고리 모양의 띠), 프란치스코 교황 재위 기간에 주조된 동전과 메달, 그의 재위 업적을 담은 두루마리 문서가 철제 원통에 봉인됐다. 과거에는 장례 미사를 마친 뒤 사이프러스·아연·참나무 등 세 겹으로 된 삼중관 입관 절차를 거쳤지만, 소박한 삶을 강조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해 11월 장례 예식을 개정해, 아연으로 내부를 덧댄 목관 하나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후 장지는 비공개로 진행됐으며, 의식은 케빈 패럴 (Kevin Farrell)추기경이 집전했다.
바티칸에 따르면, 장례 미사에 앞서 지난 23일부터 사흘간 진행된 일반 조문에는 약 25만명이 성 베드로 성전을 찾아 조의를 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은 전임자들과 달리 바닥과 가까운 낮은 목관에서 조문객을 맞이했다. 장례 미사를 시작으로 5월 4일까지 '노벤디알리(Novendiali)'로 불리는 9일간의 공식 애도 기간 동안 성 베드로 광장에서 매일 추모 기도회가 열린다. 교황의 무덤은 4월 27일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프랑스 일간지, 모든 이에게 마음을 연 ‘민중의 교황(pape du peuple)'
마크롱 대통령, “가장 소외되고 약한 이들과 함께한 교황” 추모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에 프랑스 전역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추모하며 “가장 취약하고 연약한 이들의 곁에 항상 함께했던 인물”로 추모하며,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진심 어린 애도의 뜻을 전했다. 마요트(Mayotte) 섬을 방문 중이던 그는 교황 선종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평생을 정의를 위해, 그리고 형제애적 인간성을 위한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인물”이라고 강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은 프랑스 주요 일간지들의 1면을 장식했다. 르 파리지앵(Le Parisien)은 교황을 "민중의 교황(Le pape du peuple)"으로, 르 피가로(Le Figaro) "안녕(Adieu)" 짧은 제목으로 그의 소박하고 따뜻한 리더십을 회고했다. 르 쿠리에 드 뤼에스트(Le Courrier de l’Ouest)는 "민중의 친구인 프란치스코 교황(Le pape François, ami des peuples)", 라 데페슈(La Dépêche)는 "가난한 자들의 교황(c’était le pape des pauvres)"라는 제목을 통해 교황이 평생 헌신해온 사회적 약자 보호의 발자취를 되새겼다. 라 크루아(La Croix)는 "교회를 개혁하길 원했던 교황(Le Pape qui voulait réformer l’Eglise)"이라는 제목으로, 교회 개혁을 위한 교황의 의지와 실천, 그가 추진했던 개혁의 발자취를 조명했다.
진보 성향의 뤼마니테(L’Humanité)는 “이주민들의 평화와 성령의 이름으로(au nom de la paix des migrants et du Saint-Esprit)”라는 제목 아래, 교황의 인도주의적 신념과 이민자 보호에 대한 그의 메세지를 부각시켰다.
지역 언론 역시 교황의 죽음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특히 프란치스코 교황이 생전 방문했던 세 개의 도시, 스트라스부르, 마르세유, 아작시오 등 도시의 일간지들은 그를 추모하는 특집 기사를 마련했다. 라 프로방스(La Provence)는 마르세유 방문 당시 6만여 명의 신자가 운집했던 사실을 조명하며 "세계의 교황(Le pape du monde)"이라 명명했고, 레스트 레퓌블리칸(L’Est républicain)은 ‘프란치스코, 시대에 깊이 뿌리내린 교황(François, un pape bien ancré dans son époque)’제목으로 그가 남긴 포용의 메세지를 조명했다. 라 부아 뒤 노르(La Voix du Nord)는 "전 세계가 교황을 애도하다(Le Monde pleure le pape)"라는 제목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죽음을 둘러싼 전 세계적 추모 분위기를 전했다.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리베라시옹(Libération)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죽음 :우리는 교황을 잃었다(Mort du pape François : Perdimux Papam)" 라는 기사에서, “교황은 가난한 이들, 이주민, 그리고 환경 보호 등 주요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점을 평가하면서도, 일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실망을 주었다’고 지적했다. 즉,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 일부 계층과는 갈등을 빚기도 했으며, 특히, ‘극우 진영에서는 그가 강조(대표)하는 가치들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하기도 했다’고 되짚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은 그의 업적과 논란을 동시에 조명하게 했지만, 그가 남긴 정의와 평화의 메시지는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유산으로 남을 전망이다.
<현 경 기자 dongsimje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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