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파리에 살아야 할 몇 가지 이유 Ep.24 <파리의 리틀 도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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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4-01 03:08 조회 105 댓글 0본문
루브르 박물관에서 오페라 가르니에로 향하는 길목, 생 탄(Saint-Anne) 거리 일대는 '리틀 도쿄'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곳은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비스트로보다 일찍 열고 늦게 닫는 아시아 식당들이 밀집해 있어,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인파로 북적인다. 예약을 기본으로 하는 프랑스 식당과 달리, 이 동네 식당들 앞에는 언제나 정갈한 대기줄이 늘어서 있다. 기다림의 행렬은 하나의 마케팅이 되어 식욕을 자극한다. 하지만 파리에서 긴 줄을 결코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상대적으로 긴 점심시간과 프랑스인들의 수다를 즐기는 식사 스타일은 회전율을 한없이 악화시킨다. 입장을 눈앞에 두고도 생각보다 줄이 줄지 않아 곤욕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 사이에선 파리 최고의 라멘, 우동, 쌀국수 등을 두고 언제나 의견이 갈린다. 프랑스 요리에 대해서는 대개 권위 있는 평가 기준을 따르면서도, 면 요리만큼은 결코 물러서는 일이 없다. 우리에게 면 한 그릇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향수를 달래는 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논쟁은 가성비나 분위기를 논하는 데 그치지 않고, 때때로 정체성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리틀 도쿄에 자리한 쿠니토라야 (Kunitoraya)는, 우동을 둘러싼 논쟁의 중심에 있는 식당 중 하나다. 나는 이곳의 우동이야말로, 맛의 미학뿐 아니라 아름다움의 미학까지 담아낸, 우동다운 우동이라 생각한다. 세 가지 이상의 재료가 어우러진 다시 국물은 맛이 깊고, 손으로 적당히 쳐서 갓 뽑은 듯 신선한 면발은 두껍지만 부드럽다. 유럽에선 좀처럼 보기 어려운 지름이 작은 대파가 일정한 두께로 썰려 듬뿍 올라간 모습도 인상적이다. 특별한 재료나 기교 없이 기본에 충실한 한 그릇이지만, 우동이 지닌 절제의 미덕은 상당한 정성을 요구한다. 소스의 고장이라 불리는 프랑스에서, 절제는 자칫 싱겁고 밋밋하다는 평을 듣기 쉽다. 그런 곳에서 우동이 자기 정체성을 우직하게 지켜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리틀 도쿄에 메아리치는 화려한 우동 변주곡들 사이에서 쿠니토라야의 우동은 몇십 년째 입안에 잔잔한 감칠맛 하나만 남기고 포말처럼 사라진다.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일본 작가 세키구치는 이런 일본 문화의 정체성을 '옅음'의 미학이라 설명했다. 소리치지 않는 맛, 조용히 들 려주는 이야기는 오히려 더 깊은 집중을 이끈다. 덜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한 그릇의 조용한 위로를 방해하는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우리 돈 3만 원이 넘는 가격일 것이다. 밀가루, 소금, 물이 전부인 것 같은 우동이 이토록 비쌀 이유는 무엇일까.
사누키 우동의 성지로 불리는 일본 시고쿠의 가가와 현에선 우동을 팔지 않는 가게를 찾는 것이 더 어렵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들판에도, 우동집 하나는 꼭 있다. 온몸을 실어 정성껏 밟아낸 면을 그렇게나 넉넉히 담고도, 그 한 그릇은 아직도 몇천 원이면 충분하다. 하루 한 끼 이상 면을 먹는 가가와 현의 사람들에게 우동은 단조롭고, 관습적인 그들의 일상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애정을 담아 "우동이라는 음식엔 인간의 지적인 욕망을 마모시키는 요소가 들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침에 먹고도 저녁에 또 생각나는 이유가 단지 익숙하거나 저렴해서만은 아니다. 그 비결은, 색이 바래듯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맛의 여운에 있다. 뚜렷한 맛이 없기에, 오히려 미세한 감각들은 되살아난다. 자극적인 요리로 점점 무뎌져 가는 혀끝의 감각이든, 이방 땅에서 매일 지워져 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이든...
<윤영섭 0718sam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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