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의 파리광장 답사기- 소르본 광장 (Place de la Sorbonne), 여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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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3-18 04:20 조회 225 댓글 0본문
19세기 말 한반도에 도착한 광산학교 출신의 프랑스인
파리광산학교 사진 출처: www.minesparis.psl.eu
소르본 광장을 나와 좌측을 보면 뤽상부르 정원(Jardin du Luxembourg)이 보인다. 이 정원의 정문을 지나 조그만 크기의 학교 문 앞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에서 한국영화에 관한 세미나를 할 예정이다. 지인들과 유럽 문화유산의 날(Journées européennes du patrimoine)에 이미 이 오래된 학교의 속 살을 들여다보았기에 이 학교 방문은 처음은 아니지만 세미나 장소가 궁금했다.
이 학교의 이름은 광산학교. 학교의 이름 대로 학생들은 졸업 후 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오는 임무를 맡아 온 것인데. 남의 땅에 가서 노다지를 찾는 광산 개척에는 지정학적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지정학적 이해에는 해당 지역의 문화 이해가 필요할 것이고 문화의 이해 중 해당 지역 영화의 이해가 그 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후! 길다.)
그리해서 내가 광산학교에서 한국영화를 강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내 강연회를 잘 들으면 즉, 한국영화를 통하여 한국문화를 이해하면, 한반도에서 노다지를 잘 캐 올 수 있다?라는 것이 주제는 아니었고 한국영화를 통해 본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이해가 주제로 선택되었다. 발표 전에 행사의 담당교수와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파리광산학교 사진 출처: www.minesparis.psl.eu
우선 광산학교에 대한 소개가 시작되었는데 이 학교의 이름은 « L'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mines de Paris이고 École des mines de Paris » 혹은 « les Mines »이라 불리다가 2008년에는 « MINES ParisTech » 그리고 2022년부터는 « Mines Paris – PSL »라고 불린다고 했다. 모두 광산이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그는 이 학교가 « directeurs intelligents, 지능적인 관리자 »를 양성한다는 목표로 루이 16세의 명령에 의해 1783년 3월 19일에 설립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선발이 엄격한 프랑스 공과대학 중 하나로 파리 외에는 낭시, 릴, 생테티엔생(Saint-Étienne) 등의 도시에도 이와 같은 국립 고등 광산학교들이 존재한다고 라며 광산학교에 대한 너무도 기나긴 설명을 끝냈다.
-생테티엔(Saint-Étienne)에도요? 거긴 언제?
-1816년, 루이 17세가 그곳에 광산학교 설립을 명령했어요.
-그 학교 출신이 19세기 말에 한반도에 도착했어요.
-아!
한국영화에 대한 강연회가 끝나고 그는 나에게 19세기에 한반도에 도착한 광산학교 졸업생에 대하여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내가 예전에 써 둔 한반도 최초의 프랑스 교육과 관련된 기사 하나를 떠올렸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1831년 조선에 선교사들을 통해 기독교를 전파하는 임무를 시작했다.
1836년에 프랑스 신부 3명이 조선에 도착하고 1837년에는 김대건이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다. 그는 마카오 신학교에서 라틴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으며 1845년 8월 17일에 최초의 한국 천주교 사제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 왕조는 천주교 신자에 대한 탄압 정책을 고수하였고, 김대건은 한국으로 돌아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참수당했으므로 한국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887년 프랑스는 최초의 공식 대표로 빅토르 콜린 드 플랑시 와 모리스 쿠랑을 파견했고 프랑스는 우편 서비스, 철도 건설, 세관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싶어했다. 특히 프랑스는 광업 부문을 매우 탐내고 있었다.
한성법어학교 École de langue française à Séoul (1895),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1895년 10월, 서울에 프랑스어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의 창립자인 프랑스인 에밀 마틴은 교육이나 문학의 전문가는 아니었는데 의외로 그는 프랑스 광산학교 (École nationale supérieure des mines de Saint Étienne) 출신이었다.
조선과 프랑스는 1886년 6월 한국-프랑스 통상조약을 체결 했고, 1896년에는 프랑스에 철도 건설권을 부여했으며 1901년에는 우편조약이 체결되 었고, 마침내 같은 해에 프랑스는 한반도에서 광업권을 취득했다.
1900년대 이후 프랑스인, 특히 광산 엔지니어들이 한국에 점차 들어오면서 프랑스어 교육에 대한 필요성이 커졌다. 프랑스 광산학교 출신인 이 학교의 창립자 프랑스인 에밀 마틴은 이를 이미 계산하였던 것일까?
서울 최초의 프랑스 학교 « 한성법어학교 »의 학생들은 한국에서 프랑스로 광석을 수출하는 프랑스 광부(?) 들 을 위한 통역가로 일하게 된다.
-아! 미리 다 계획이 있었구나 !
이후, 서울 프랑스학교(Lycée français de Séoul)가 용산구 한남동에서 1974년에 개교하였으며, 1985년에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로 장소를 옮겼다. 서울에 머물 때 나는 이 학교에서 영화와 관련한 아뜰리에 수업을 진행한 인연이 있다.
시나리오 작법 시간에 아이들은 사뭇 심각했지만 영상제작을 위해 교실을 빠져나오자 모두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한 미소를 띄우며 수다를 떠는 고딩들의 모습이 기억난다.
다시 « 한성법어학교 »의 창립자인 프랑스인 에밀 마틴으로 돌아가자. 대한제국 시기에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 사연들이 있다. 사실 본인 보다는 그의 처갓집과 관련이 있는 사연들이다. 최초의 대한제국 양악대 창설, 한반도의 최초 애국가 작곡, 최초의 영화상영관 탄생, 단성사의 오케스트라로 돌아온 최초의 한국인 양악대 지휘자와 단원들…등...
1895년 프랑스 파리에서의 최초의 공공 유료 영화상영 이후 영화는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영화의 도착과 함께 프랑스를 포함한 많은 서양근대문물이 도착한 대한제국. 이 시기의 많은 인물과 제도 및 각종 문물은 « 최초 »의 것들이다.
남불에 사는 클라리넷 연주자 필립과 아주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다. 그는 그 사이 가정을 일구고 세 명의 딸을 둔 가장이 되었다. 학부생 시절에 나는 남쪽 시골 청년 필립의 살아있는 남부 사투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사투리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할 때 나는 필립에게서 들은 악센트를 사용한다. 그의 고향이 극우파의 본산이어서 그런 것인지… 나는 그에게 연락하는 것을 괜히 꺼려한 듯하다. 그러고 보니 그는 내가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한국어를 포함한 한국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한 적이 없다. 필립은 다음 주 월요일에 음악 관련 출판사에 볼 일이 있어 파리에 온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 시골 친구에게 나는 무엇이 먹고 싶냐 물었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최초로 나에게 필립이 분명한 한국어로 대답을 하는 것이다. « 김치! »라고...
<강창일>
파리 8대학 연극영화 박사, 파리 10대학 비교문학 연구자, 무성영화 변사. 프랑스 방방곡곡을 누비며 강연회와 상영회를 통하여 한국영화를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 Les Débuts du Cinéma en Corée »(Ocrée Editions, 2021), « Le Cinéma Coréen Contemporain : A l'Aube de Parasite »(Ocrée Editions,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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