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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의 파리광장 답사기- 소르본 광장 (Place de la Sorbonne), 다섯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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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3-04 04:52 조회 2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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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국 선비, 복녹특(볼테르)의 "계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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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잡지 L’Éléphant의 특별판(Hors-Série) "계몽의 세기(Le Siècle des Lumières)" 표지. 출처: www.lelephant-larevue.fr



추기경의 이름을 딴 리슐리외(Richelieu) 강의실 앞. 커피 자판기에서 일회용 컵을 모으는 사나이가 보이기 시작하면 시간은 정확히 12시이다. 대학 문을 나와 소르본 광장을 힐끔 쳐다보고는 건물을 따라 좌측으로 돌면 퀴자스 가(Rue Cujas)골목이 나온다. 이 골목에서 아침에 본 노숙자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는 다행히 일어나 일상생활을 시작했을 것이다. 그는 이 골목 반지하 창문으로부터 나오는 온기로 밤을 지새운다. 그의 침대인 종이 판지를 지나면 보이는 우체국. 


편지들을 보내고 현금을 뽑고 좌회전하면 생 작크(Rue Saint-Jacques)거리이다. 이곳에서 보면 녹색지붕의 수수께끼의 탑이 눈에 들어온다. 소르본 천문대 (Observatoire de la Sorbonne)이다. 이 언덕 길을 내려가면 건물 틈새로 베트남 할머니가 프랑스에서 가장 저렴한 샌드위치를 팔고 있다. 이 동네 좁은 골목길 구석에는 베트남 노인들이 저렴한 음식을 파는 숨겨진 가게들이 있으나 점차 하나 둘 사라지고 있다. 


샌드위치를 들고 다시 첨성대 아니 천문대 방향으로 올라오다 보면 길 건너 루이 르 그랑 (Lycée Louis Le Grand)이라는 고등학교가 보인다. 장소와 건물은 직접적 연관성 없이 어떠한 특정 인물의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하는데 이곳을 지나갈 때 나에게는 태양왕 루이 14세보다는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가 그의 아롱다롱한 10대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기 때문인 듯하다. 


그는 볼테르(Voltaire)라는 필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프랑스의 대표적인 계몽주의 작가이다. 몇 걸음 더 걸으면 생트 제네비에브 도서관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정면을 보면 국가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인물들만 모신다는 팡테옹이 보인다. 

볼테르는 1791년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나는 생트 제네비에브 도서관에서 « 한국에 도착한 계몽주의 »라는 주제의 연구 기사를 쓴 적이 있다. 볼테르는 « 복녹특 »이란 이름으로 지금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학부(學部)에서 간행한 세계사 교과서 『태서신사』(泰西新史)를 통하여 1897년 한반도에 소개된다. 


갑오개혁기 근대적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학부가 설립되고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 및 교 과서 간행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세계사 교육을 위한 교과서로 편찬된 『태서신사』는 법국(프랑스)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이 책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사상적 배경을 설명하는 가운데 법국 선비 복녹특(볼테르) 이를 언급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1897년 대한제국에서 출간된 이 책에는 볼테르와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생각과 백성들의 반응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을까 ? 아래는 『태서신사』 중 1권의 제11절의 시작이다. 한자가 안 보이는 것이 독특하다. 그러나 현대 한국어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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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서신사』, 1897년.                                                                                               출처 : University of Toronto 


뎨십일졀 법국 션ᄇᆡ라 노의왕 졔십오 말년에 문풍이 셩ᄒᆞ 야 ᄀᆡ간ᄒᆞᆫ 글은 다 통달ᄒᆞᆫ ᄉᆞᄅᆞᆷ과 ᄌᆡ조 잇ᄂᆞᆫ 션ᄇᆡ의 지은 바ㅣ라 조졍 대소ᄉᆞ무ᄅᆞᆯ 낫낫 치 말ᄒᆞ되 그 명의ᄒᆞᆫ 바ᄂᆞᆫ 무 비 웃ᄉᆞᄅᆞᆷ으로 ᄒᆞ야곰 구습을 바리고 신법을 죳치라 ᄒᆞ미라 . 


 « 노의 왕(루이 15세)의 시기에 새로운 경향의 학풍(계몽주의)이 성행하였다. 당시 출간된 글들로 말하면 모두 학식이 뛰어난 사람과 재능 있는 선비들이 지은 것이다. 이 선비들은 구습을 버리고 새로운 법을 따르도록 권장하니 그런 까닭에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민심을 속박하고 능멸하며 속이고 억누르고 가혹하게 구는 것을 비판하더라. 더불어 이들은 모두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 바를 행하는 윗자리에 있는 자들은 매사를 다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고 강퍅하게 행동하여 길가는 사람들까지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아파하고 원망하게 하고 있음을 매섭게 지적하면서 임금은 마땅히 민심을 따르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고, 임금은 자기 마음대로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에 온 나라의 백성들이 이 선비들의 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어 손에서 놓지 않고 입으로 외워 기뻐하고 격려하더라. 백성들은 모두 곧 조정이 즉시 구습을 바꾸어 모두가 평안할 것이라고 여겼다. 이 선비들 중에서 복녹특(볼테르)은 저술한 것이 많았고 그 재능을 인정받아 명성이 높았는데 그의 글은 충분히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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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s://www.folio-lesite.fr/


1897년 출간된 『태서신사』는 법국의 선비들 즉, 계몽주의자들은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리들, 민심을 따르지 않는 임금이야말로 바뀌어야 할 구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당시가 고종이 대한제국의 임금으로 군림하고 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보면 계몽주의자들의 생각을 서술하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것일 수도 있겠다.


볼테르는 그의 생애 동안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한다. 그의 신념과 작품들은 당시 사회의 권력자들과 충돌했으며, 그 결과 투옥, 망명, 작품 금지 등 다양한 형태의 탄압과 마주했다.


『태서신사』11절의 볼테르에 대한 해설의 말미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 복녹특이 이르되, 예로부터 현명한 선비들은 비록 가난하더라도 폭군을 기꺼이 섬기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 » 


불국 선비 복녹특과 법국 계몽주의 선비들에 관한 묘사와 해설에서 우리는 윗자리에 있는 자들이 백성을 가르치려 드는 태도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계몽은 권세를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무리들이 국정을 장악하여 민심을 속박하고 능멸하며 속이고 억누르고 가혹하게 구는 자들이 행하여야 할 반성의 촉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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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일>

파리 8대학 연극영화 박사, 파리 10대학 비교문학 연구자, 무성영화 변사. 프랑스 방방곡곡을 누비며 강연회와 상영회를 통하여 한국 영화를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 Les Débuts du Cinéma en Corée »(Ocrée Editions, 2021), « Le Cinéma Coréen Contemporain : A l'Aube de Parasite »(Ocrée Editions, 202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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