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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형 작가 <프로방스 여행> 연재(20) -피카소의 아틀리에 그리말디성, 프로방스의 색과 빛에 매료된 니콜라 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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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7-09 06:08 조회 81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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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저서

<프랑스를 걷다>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연재 이후, 

<프로방스 여행-내 삶이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연재합니다.

연재를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피카소의 아틀리에 그리말디성
피카소 미술관은 발로리스 동쪽의 지중해에 면한 작은 도시 앙티브(Antibe)에도 있다. 1920년대에 앙티브 주변에서 바캉스를 보내곤 했던 피카소는 그리말디성이 매물로 나오자 꼭 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앙티브시가 먼저 성을 사들여 예술역사 미술관을 만들면서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 미술관의 도르 드 라 수세르 관장은 미술관 문을 열자 가장 먼저 시냑과 유트릴로, 보나르 등 코트다쥐르 지역을 자주 찾는 젊은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그러나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성채 위에 마치 파수병처럼 바다를 마주 보고 서 있는 이 성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은 1946년에 이루어진 도르 드 라 수세르와 피카소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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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아틀리에였던 앙디브의 그리말디성

피카소가 작업할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도르 드라수세르는 이 세계적인 화가가 작품을 기증해 주기를 바라며 미술관의 맨 위층을 내주었다. 결과는 이 미술관장의 기대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피카소는 가을 내내 성을 자신의 아틀리에로 썼다. 겨울이 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큰 사이즈의 작품들을 아틀리에에 남겨두고 성에서 나가야만 했고, 미술관 측은 이 작품들을 다음 해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피카소는 이 장소를 마음에 들어해 그 이후로도 매년 이 성을 찾아와 작업을 했고 데생과 도자기, 회화 작품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말디성은 피카소와 피카소 미술관을 이어주는 중개자가 된 것이다. 


■ 프로방스의 색과 빛에 매료된 니콜라 드 스탈 
피카소 미술관에는 러시아 출신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추상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니콜라 드 스탈(1914~1955)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니콜라 드 스탈은 인류의 비극인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 차르의 도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고급장교 가문에서 태어났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를 떠나야만 했고, 1919년 부모를 잃고 어린 시절을 브뤼셀에서 보호자와 함께 보내게 된다.

그는 미술, 특히 플랑드르 회화에 매료되어 1933년 브뤼셀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추상화를 발견한다. 사회적 리얼리즘으로 회귀하던 이 시대에 추상화는 아직 전위적이었다. 니콜라 드 스탈은 위대한 현대 화가들, 특히 세잔과 브라크에게 열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까지 그는 모로코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역시 화가인 연인 잔닌 귀유와 함께 파리에 정착했다. 그는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으며, 빈번하게 자신의 작품을 파괴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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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드 스탈 <콘서트>

외인부대에 들어갔다가 잠시 동원되기도 했던 니콜라 드 스탈은 1940년부터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미 병세가 심각했던 잔닌과 함께 니스에 정착한다. 장 아르프와 들로네 같은 화가와 교유하면서부터 그는 더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 사이에서 딸과 아들이 태어나지만, 그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진다.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한 이후로 그의 개성은 한층 더 강해진다. 회색 단색화, 간결한 화풍, 매우 두터운 물감층…. 그는 동시대 화가 중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잔닌은 결국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천성적으로 자유로운 니콜라 드 스탈은 살롱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사교적이지 않았던 성격 탓에 친구는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브라크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작품을 직접 팔기 시작하고, 비평가들도 개성이 강한 이 화가에게 관심을 가진다. 1948년 프랑스에 귀화한 후, 그의 작품 세계는 밝아진다. 힘든 시절을 보내고 마음의 안정을 찾은 그는 다시 태어난 듯 빛 속으로 들어간다.

1959년대 들어 니콜라 드 스탈은 먹 같은 새로운 기법들을 탐색한다. 그의 작품이 인기를 끌고, 미국 수집가들이 그것을 사들인다. 이 다작의 시기에 그는 특히 〈축구선수들〉 연작을 그리는데, 이것은 비구상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구상과 관계를 맺는 작품들이다.

생애 말기 프로방스의 색과 빛에 매료된 그는 이곳에 정착하여 빛과 하늘, 바다를 밝고 강렬하고 선명한 색으로 그려냈다. 서정적 추상으로 요약되는 그의 작품 중 가장 눈에 띄는 그림은 죽기 직전 3일 동안 그리다 만 〈콘서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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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드 스탈이 살았던 집

‘추상이자 구상’인 이 작품의 전경 왼쪽에는 직사각형의 검은색 피아노가 있다. 오케스트라의 분홍색, 흰색, 회색 악보와 보면대가 흰색과 검은색 건반과 뒤섞여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는 스트링이 없는 배 모양의 황토색 더블베이스가 있다. 더블베이스의 지판 윗부분은 그림 맨 윗부분까지 올라와 있다.

이 작품이 걸려 있는 전시실의 창문 너머 멀리 포르 카레(Fort Carré) 성채가 보인다. 이 성채에서 정기적으로 재즈 공연을 하곤 했던 키스 자렛과 게리 피콕이 금방이라도 저 그림 속의 피아노와 더블베이스를 연주할 것만 같다. 이래서 예술은 영원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피카소 미술관을 나와 앙티브 기차역으로 이어지는 해변길을 따라 200m쯤 걸어가다 보면 초록색으로 칠해진 문이 있는 3층짜리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에는 이런 현판이 붙어 있다.

“화가 니콜라 드 스탈(1914~1955)이 이 집에서 살다가 1955년 3월 16일 죽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마흔하나에 그는 살던 집 베란다에서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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