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최초로 외국인 출신, 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부부 팡테옹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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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2-27 04:50 조회 2,265 댓글 0본문
최초로 외국인 출신, 공산주의자 레지스탕스 부부 팡테옹에 안장
« 미사크 마누쉬엉과 그의 부인 멜리네 »
1940년대 나치 독일군이 점령한 프랑스를 위해 무장투쟁으로 저항하다 처형당한 이민자 저항가(레지스텅,résistant)이자 공산주의자인 « 미사크 마누쉬엉 (Missak Manouchian)과 멜리네(son épouse Mélinée) »부부, 이 두 사람이 지난 2월 21일 수요일(현지시각) 함께 파리 팡테옹(Panthéon)에 안장되었다. 1944년 마누쉬엉이 독일군에 총살당한지 정확히 80년이 되는 날이다. 이로서 두 저항가는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결정에 따라 팡테옹에 안장된 역대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인물이 되었다.*
*(그들 이전에,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이미 세 명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파리의 네크로폴(la nécropole de Paris, 파리의 묘지), 즉 팡테옹에 안치시켰다: 시몬 베일(Simone Veil), 모리스 제네부아(Maurice Genevoix), 조제핀 베이커(Joséphine Baker) 등이다. 2024년 2월 9일 전 법무부 장관이었던 로베르 바당테르(Robert Badinter)의 사망 후, 마크롱 대통령은 고인 가족과 협의하여 팡테옹에 안장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 프랑스를 위해 흘린 피는 모두 같은 색 »
2024년 2월 21일은 아르메니아 출신의 프랑스 이민자 시인이며 노동자로, 미사크(당시 37세)가 독일군에 의해 몽-발레리앵(Mont-Valérien)에서 처형된 날로부터 정확히 80년 후다. 1944년 2월 21일에 그와 함께 대부분 총살당한 22명의 젊은 마누쉬엉 그룹(Groupe Manouchian)의 전우들도, 80년이 지난 이날 상징적으로 함께 ‘영웅들의 신전’에 들어갔다: 그들의 이름은 마누쉬엉(Manouchian) 부부가 안장될 지하실에 새겨진다.
"이는 공산주의자와 외국인 저항가의 팡테옹 입성" 이라고 엘리제 궁은 기록했다. 이는 1964년에 쟝 물랭(Jean Moulin)이 팡테옹에 안장된 이후, 8명의 역사적인 위대한 저항가들이 팡테옹에 입성되었지만, 이들 중 공산주의자는 없었다.
팡테옹 안장식에서 ⓒTF1 Info
마사크는 생전에 두 차례 프랑스 국적 취득을 신청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외국인이자 공산주의자였던 그의 팡테옹 안장을 결정한 프랑스 정부는 "마누쉬엉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보편적 가치를 구현했고, 공화국(la République)을 수호했다"며 "프랑스를 위해 흘린 피는 모두에게 같은 색"이라고 그 공을 인정했다.
▶마누쉬엉 부부의 역사와 기억은 저항 운동의 상징적인 존재
미사크 마누쉬엉(Missak Manouchian, 1906-1944): 1906년 9월 1일 터키(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 기독교 농민 가정 출신인 미사크 마누쉬엉(Missak Manouchian)은, 아르메니아 대학살(Génocide arménien)에서 살아남아 보육원에서 자랐다. 1925년 프랑스로 이주해 시트로엥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공산주의 모임에 자주 참여하며, 극우파의 부상에 분노해 공산당에 가입한, 프랑스 공산주의 저항 운동가이자 시인이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동안 프랑스에서 활동했다. 당시 같은 아르메니아인으로 대학살의 생존자였던 (미래의) 아내 멜리네를 만났다. 그는 레지스탕스(저항 운동)활동에 참여하여,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싸우고, '마누쉬엉 그룹(Groupe Manouchian)'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저항 활동을 수행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마누쉬엉은 프랑스 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했다가 동원 해제된 이후엔 무장 투쟁에 참여하며 반나치(Antinazi)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는 조셉 엡스테인(Joseph Epstein, 유대인 공산주의자 저항가로 FTP-MOI 대장)의 부대장으로 알려졌으며, 1943년 8월 이후 프랑스 내부 저항 운동에서 FTP-MOI(프랑스 공산당 내의 외국인 무장 단체) 지역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는 "그룹 마누시안-보초프-레이만"의 23명 저항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계급을 가졌다. 이 그룹의 저항가들은 체포된 후, 신속한 재판을 거쳐 1944년 2월 21일 몽-발레리앙(Mont-Valérien)에서 총살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1944년 2월 나치 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안티세미티즘(Antisémitisme, 반유대주의)운동의 일환인 '적색 포스터(Affiche rouge)'로 다루어졌다. ‘적색 포스터’란 이 그룹의 멤버들(나치의 테러리스트 명단에 올라가 있던 그와 그의 동료 23명)의 얼굴이 실린 포스터로, 그들이 나치에 저항하면서 체포되어 처형되었음을 알리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이 캠페인은 반유대주의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으며, 그 이후 이 적색 포스터는 프랑스 역사에서 이 그룹의 용감한 저항활동으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미사크와 멜리네 부부
멜리네 마누쉬엉(Mélinée Manouchian,1913-1989): 1913년 11월 13일에 오스만 제국의 코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멜리네 마누쉬엉(Mélinée Manouchian)은, 1989년 12월 6일에 프랑스의 플뢰리-메로지(Fleury-Mérogis)에서 사망했다. 아르메니아 출신 이민자로, 프랑스의 해방 이후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은 저항 운동가다. "적색 포스터"의 영웅, 미사크 마누쉬엉(Missak Manouchian)의 부인으로, 사망한 남편의 전기와 그가 남긴 시를 출간했다.
책 "Manouchian"의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드니 페상스키(Denis Peschanski)는 “마누쉬엉은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시인(poète), 공산주의자(communiste), 기독교인(chrétien),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e), 애국자(patriote) 등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인권에 대한 사랑 속에서 이 모든 저항자들(résistants)을 통합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수렴(결합)을 상징’한다."라고 설명한다.
2차 대전 당시, 프랑스 점령한 친나치의 반유대주의 캠페인으로 활용되었던 적색 포스터
▶ 팡테옹에 안장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
팡테옹은 "국가적으로 인정받은 위대한 인물들"을 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명시된 기준은 없다. 프랑스 국적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팡테옹에 안장된 인물들은 모두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필수 조건이 아니다. 아르메니아 출신이면서 무국적자인 미사크 마누쉬엉과 함께, 팡테옹은 이번에 처음으로 외국인을 받아들였다. 1924년에 프랑스에 도착한 그는 두 번의 국적 신청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적을 얻지 못했다. 공산당 소속 상원의원인 피에르 우주리아(Pierre Ouzoulias)는 "프랑스 국적이 아닌 사람도 프랑스를 위해 희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암묵적인 기준(Critères implicites)이 존재한다. 즉 ‘본보기가 되는 인격’을 기대하며, ‘공화국의 이상을 대표하는 사람’ (예: 작곡가 헥토 베를리오즈 (Hector Berlioz)나 마르키 드 라페이에트(Marquis de La Fayette) 과 같은 인물은 왕정적 경향 때문에 배제되었다)이어야 한다. 또한 그의 투쟁이 국가 수장의 가치와 공감되어야 한다. 따라서 엘리제 궁(대통령)은 미사크 마누쉬엉이 "우리의 위대함 한 부분을 품고 있다"고 평가했으며, 그는 즉, "독특한 용기, 모든 규범을 뛰어넘는 열정, 고요한 헤로이즘(héroïsme, 영웅적인 품성)"을 갖추고 있다고 설명했다.
<파리광장/ 현 경 dongsimjeo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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