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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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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1-02 04:39 조회 1,59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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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이유 궁의 방, 세번째



파리광장은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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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의 방


여왕의 방을 지나면 나타나는 귀족들의 방(the Room of Nobles)은 여왕의 알현실이자 집무실이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여왕은 소파에 앉아 있고, 작위를 가진 귀부인들은 접이식의자에 앉아 여왕을 둥그렇게 둘러싸고 있다. 여왕을 모시는 시녀가 들어와 누구누구가 여왕을 알현하기를 청한다고 알리고 나서 뒷걸음질치며 무릎을 꿇고 세 차례 절을 하면 여왕은 매번 고개를 끄덕여 답례를 한다. 


이 방의 벽장식은 1785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리샤르 믹크의 주도하에 다시 이루어졌다. 대리석 벽난로나 벽의 버팀용 장식판은 이때 설치되었다. 1786년에 장 앙리 리에스네르가 만든 마호가니 세모꼴 장과 장롱, 그리고 루이 15세의 장식융단 전신초상화를 주목하라. 옥색 벽지도 마리-앙투아네트가 다시 바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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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의 방


식사의 방(the antichamber of the Grand Couvert) 천장에 전투 장면을 그린 그림이 보이는 것은 이 방이 1680년까지만 해도 여왕의 호위대원들이 머무르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대리석으로 된 버팀용 장식판이나 여섯 점의 문 위쪽 아치형 단색화(고대의 유명한 여성들을 그린)는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진스카 때 설치되었다. 이 방은 귀족들이 모여 공식식사를 한 곳이다. 1764년 마리 레진스카 왕비는 식사 내내 여덟 살 먹은 한 소년과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모차르트였다!


식사를 할 때는 왕의 가족만 식탁에 앉고 지체 높은 귀족은 접이식 의자에 앉았으며 나머지는 전부 서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식으로 식사하는 걸 안 좋아해서 아예 장갑도 안 벗고 그냥 음악만 연주하게 했다고 한다.


장식은 대체로 17세기 풍이지만 다른 그림들은 18세기에 그려졌다. 우선 눈에 띠는 그림은 오른쪽에 걸려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족 초상화>(1787)다.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이라는 여류화가가 그린 것이다.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인 비제 르브룅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동갑이고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 여류화가가 나중에 왕의 화가(여자가 왕의 화가가 된다는 것은 그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불가능한 일이었다)가 된 것은 순전히 마리 앙투아네트 덕분이었다. 이 그림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세 아이가 그려져 있다. 맨 왼쪽에 있는 아이는 큰딸인 마담 르와얄이다. 그리고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아이는 1781년에 태어난 둘째 아이 루이 조제프인데, 왕위를 물려받게 될 황태자였지만 1789년에 죽는다. 그리고 엄마 품에 안겨 있는 것이 장차 루이 17세가 될 아이인데 역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에 죽는다. 요람이 비어 있는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아이인 소피 베아트릭스가 이 그림을 그리던 도중에 죽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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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족 초상화>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그림을 그리도록 한 것은 그 전해에 벌어진 목걸이 사건으로 떨어진 자신의 대중적 인기를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저렇게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2년 뒤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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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왕 호위대의 방


여왕 호위대의 방(the Room of the Queen’s Guards)의 천장은 목성(주피터)의 방(나중에 앞에서 본 전쟁의 방으로 바뀌게 될 방)에 붙어 있던 것을 떼어 와서 다시 붙인 것이다. 한가운데는 <정의의 신과 자비의 신이 따르는 가운데 수레에 탄 주피터 신>(노엘 코이펠)이 그려져 있다. 이 화가는 벽난로 위에 역시 주피터 신과 관련된 그림을 그렸다. 천장 모퉁이를 보면 루이 14세 궁정의 신하들을 그린 그림이 보인다. 

이 방에서 열두 명의 호위대원들이 밤낮으로 여왕을 지켰다. 1789년 10월 6일 새벽, 그중 한 명이 “여왕을 구하라!”라고 소리치고 폭도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소리를 들은 왕비의 하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왕비를 피신시켰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대관식의 방이 있다. 

원래 이 방은 경호실이었는데 루이 필리프(프랑스 왕. 재위 1830-1848년. 사촌인 샤를 10세의 왕정복고체제가 “영광의 3일”로 인해 무너진 덕분에 왕이 되었다. 이 48년이라는 기간은 흔히 7월 군주제라고 불린다)가 나폴레옹에게 바치는 방으로 만들었다. 

왼편에는 자크루이 다비드(1748-1825)가 그린 유명한 그림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조세핀 황후의 대관식>이 있다. 다비드는 루브르 미술관에도 걸려 있는 이 그림을 1808년에 그리기 시작, 망명 중이던 브뤼셀에서 1822년에 끝냈다. 


오른편에는 역시 다비드가 그린 <독수리기를 나눠주고 난 뒤에 행해지는 군대의 나폴레옹에 대한 맹세>이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제국을 상징하는 독수리기를 군 지휘관들에게 나눠주고, 지휘관들은 나폴레옹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원래 다비드는 그림 윗부분에 승리의 여신이 월계관을 군인들에게 나눠주는 장면을 그렸는데, 나폴레옹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닌 것은 그리지 말라고 해서 뺐다고 한다. 그리고 조세핀은 실제로는 이 장면에 등장했었지만, 이 그림을 그릴 당시에는 이미 이혼을 해서 뺐다. 


앞에 보이는 그림은 그로라는 화가가 그린 <아부키르 전투>다. 아부키르는 지중해에 면한 이집트 도시. 1799년 7월 영국군 함대의 지원을 받은 오토만 군대가 이 도시를 점령했고, 나폴레옹이 지휘하는 프랑스 군은 이 도시를 점령하러 전투를 벌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터키 군 지휘관 무스타파 파챠가 성에서 나오더니 부상당하거나 죽은 프랑스 병사들의 목을 잘랐다. 이에 격노한 프랑스 군은 분기탱천, 다시 전투를 시작하여 파차르를 생포했고, 그의 손가락 3개를 잘라낸 다음 이렇게 말했다. “또 다시 까불면 그때는 손가락이 아닌 더 중요한 부위를 잘라버리겠다.” 살아남은 터키 병사 4천 명은 영국 함대로 돌아가다가 다 빠져죽었다고 한다. 나폴레옹군은 이 전투를 끝으로 이집트 원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 그랑 트리아농 궁

그랑 트리아농 궁은 루이 14세가 망사르를 시켜 1687년에 짓게 했는데, 외부가 장미색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서 “대리석의 트리아농”이라고도 불린다. 앞마당과 궁궐, 정원, 분수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기둥들이 서 있는 “페리스틸”이라는 이름의 긴 회랑이 두 개의 건물을 연결시키고 있는 모양이다. 오른쪽 건물은 다시 트리아농수브와라고 불리는 건물과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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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 트리아농 궁


궁전 북쪽에는 프랑스 식 정원이 펼쳐져 있고, 이 정원에서 왼쪽으로 걸어 나가면 대운하와 연결되어 17세기에는 왕이나 여왕이 베르사유 궁을 내려와 운하 동쪽 끝에서 배를 타고 이 궁전으로 건너오기도 했다. 


그랑 트리아농 궁에서는 루이 14세와 러시아의 표도르 1세, 마리 레진스카 왕비, 나폴레옹, 조세핀 등이 살았고, 보다 최근에는 드골 대통령이나 미국의 닉슨 대통령,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머무르기도 했다. 


루이 14세가 이 궁전에서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은 1691년 7월부터인데, 그 당시 한창 아우구스부르그 동맹 전쟁을 치르고 있던 탓에 돈이 없어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궁 외부와는 달리 내부는 사치스럽게 장식하지 못했다. 대신 수천 개의 화분을 궁전 안에 놓아두되, 꽃향기가 하루 종일 궁전 안에 배이도록 화분을 하루에 두 번씩 교체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왕족이나 귀족 등을 이곳에 정기적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대접하곤 했는데, 궁정을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가장 먼저 여왕의 규방을 볼 수 있다. 나폴레옹의 어머니에 이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1810년 나폴레옹과 정략결혼을 한 마리 루이즈(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녀의 큰 고모다)가 규방으로 쓰던 곳이다. 나중에는 왼쪽에 있는 루이 필리프의 방과 합쳐졌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작은 거울의 방은 루이 14세 때 국무회의를 하던 방이다. 그 당시의 코니스(벽면 상단에 수평으로 둘러쳐진 긴 띠 모양의 장식)나 거울을 끼운 나무 패널이 아직 남아 있다. 그러고 나서 1706년에 실내장식이 크게 바뀌었다. 1805년에는 나폴레옹 어머니의 집무실이 되었고, 그 이후에 마리 루이즈 황후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루이 필리프 시대에 다시 국무회의실이 되었다. 원래 있던 가구들은 혁명 때 다 팔리고 나폴레옹 때 새 걸로 교체했다.


여왕의 방은 원래는 식탁을 놓고 음식을 차려놓던 곳이었는데 1691년에 루이 14세가 쓰는 방으로 개조했고, 그 뒤에는 황태자가 사용했다. 19세기 들어서는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마리 루이즈, 그리고 마리 아멜리(루이 필리프의 아내)가 사용했다. 이 방에 놓여 있는 침대가 바로 나폴레옹의 침대인데, 루브르궁에서 가져온 것이다.


여왕의 방에 면해 있는 방은 그랑 트리아농 궁이 완공되면서 바로 왕가의 예배당으로 쓰였던 방이다. 1691년에 공사를 하면서 제단이 알코브(벽을 파낸 부분) 안으로 옮겨졌다. 예배가 끝나면 이 방에 음식을 차려놓고 식사를 했다고 한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왕비의 제 1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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