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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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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10-10 05:54 조회 1,63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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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세 미술관 여섯번째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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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카미유의 임종>


10. 모네, <카미유의 임종(Camille sur son lit de mort)>, 1879, 90 x 68cm, 5, 35번 전시실 ; <센 강의 해빙, 혹은 얼음조각(le Dégel, ou les glaçons sur le Seine)>, 1880, 60.5 x 99.5cm, 5, 32번 전시실.

 1878 8, 모네는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오슈데 가족과 함께 살기로 하고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60킬로 가량 떨어진 센 강변의 베퇴유라는 마을로 이사를 간다. 이 당시 그는 그나마 그의 그림을 사주던 화상 뒤랑-뤼엘과 에른스트 오슈데가 파산을 하는 바람에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내  카미유가 몇 달 전에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원래 몸이 약했던데다가 출산의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가족도 먹여 살려야 하고, 집세도 내야 하고, 물감이랑 캔버스도 사야 하고, 그림 그릴 시간도 내야 하고, 그림도 팔아야 하고…  모네는 친구 에밀 졸라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하는데, 그가 얼마나 다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졸라에게,

 날 좀 도와줄 수 있겠나 ? 집에 동전 한 닢 없어서 오늘 당장 죽 한 그릇 끓여먹을 수가 없군. 아내도 많이 아파서 잘 보살펴줘야 하는데… 자네, 혹시 20프랑짜리 금화 세 개만 빌려줄 수 있겠나? 정 안 되면 한 개라도 빌려주게.  [] 어제 돈을 좀 구해보려고 하루종일 뛰어다녔는데  구할 수가 없었네."

 파리와 아르장퇴유에서 현대성을 상징하는 도시 풍경을 그리던 그는 바르비종에서 본 시골 풍경을 이제 베퇴유에서 다시 화폭에 옮기게 된다. 그는 가장 먼저 베퇴이유의 노트르담 교회를 매우 가까운 곳에서 세 장[<교회>(스코틀랜드 내셔널 갤러리), <베퇴이유 교회, 겨울>(오르세 미술관), <베퇴이유 교회, >(오르세 미술관)] 그린다.  어쩌면  그는 이때 돈을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 작은 마을을 상징하는 교회를 그리면 그림이 빨리 팔릴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나서 이 교회는 모네가 베퇴유에서 그린 60여 점 정도의 작품에 다시 등장하는데, 전부 전경(全景)이다.  모네는 또 아르장퇴유에서 산 배(아틀리에로 쓰이는)를 타고 집 앞의 센 강으로 나가 강에서 보이는 베퇴유를 그린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고 아내의 건강이 몹시 안 좋아서 그런 것일까. 이 시기에 그려진 그림들은 몹시 음울하고 슬프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그는 1867년과 1868년에 그린 스물아홉 점의 작품을 들고 1879년에 열린 4회 인상파전에 참여한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의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그로서는 "모네가 모든 걸 포기했다더라"는 소리를 듣기 싫었는지도 모른다. 

모네가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림을 싼값에 팔아치우는 등 애를 썼지만 아내 카미유는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1879 9월 불과 서른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때 그는 아마도 19세기에 그려진 그림들 중에서 가장 비통한 그림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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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베퇴유의 겨울>

그는 죽어가는 아내의 머리 맡에서 붓을 잡았다. 나중에 그는 친구 클레망소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비극적인 이마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죽음의 여신이 방금 그 미동조차 없는 얼굴에 남겨놓은 색깔이 서서히 점점 엷고 흐리게 변해가는 무의식적으로 찾고 있었다네. 저것은 푸른색 색조인가 ? 노란색 색조인가 ? 아니면 회색 색조인가 ? 그래, 난 그런 지경이 되어 있었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될 여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으로 남기고 싶다는 욕망은 어찌보면 당연한 거였지."

 1880년 겨울은 천재지변이 일어났다고 할 정도로 혹독하게 추웠다. 하지만 그는 돈이 없어서 한집에 살면서 자기만 바라보고 있는 열 명의 식구를 먹여살릴 수도 없었고 따뜻하게 재울 수도 없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었다. 그해 1월에 그려진 <센 강의 해빙, 혹은 얼음조각>은 모네의 절망스런 심정을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센 강이 꽁꽁 얼었다가 녹으면서 엄청나게 큰 얼음들이 강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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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퇴유 마을 

 1879년 겨울 완전히 얼어붙은 센 강은 모네가 특히 좋아하는 또 하나의 소재가 된다.  대기현상에 대한 관심이 점점 더 커져가던 모네는 이 ‘유빙(流氷)’이라는 전례없는 자연재해에 흥미를 느꼈다. 엄청나게 추운 날씨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장에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얼음 위에서 그림을 그렸다. 센 강은 꽁꽁 얼었고, 나는 강에 자리를 잡고 어떻게 해서든지 화가(畵架)를 펼치려고 애썼다.  이따금 지인이 내게 탕파를 가져다주곤 했다.  하지만 그건 내 발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춥지 않았다. 그건 추위로 손이 얼어서 붓을 떨어트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손가락을 녹이기 위한 것이었다." 

모네는 혹독한 추위에 온몸이 꽁꽁 언 상태에서도 이 물과 얼음, 빛이 시시각각 변하며 벌이는 놀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붓을 빠르게 놀림으로써 자기 앞에 펼쳐진 전경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겨울을 나타내는 색조가 사용되어 웬지 모르게 멜랑콜리한 이 작품들에서는 얼마 전에 아내를 잃은 모네의 정신적, 물질적 불안감이 강하게 느껴진다. 

프루스트는 미술품 수집가 샤를 에프러시의 집에서 이 그림을 보고 <어느 그림 애호가>라는 글에 이렇게 쓴다.  "모든 것이 반짝이는 것을, 모든 것이 이 해빙에 의해 신기루가 되는 것을 보라.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저게 얼음인지 아니면 태양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모든 얼음 덩어리들은 부서져서 하늘의 반영을 싣고 간다. 그리고 나무들은 너무 환하게 빛난다. 그래서 나무들이 계절 탓에 적갈색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종이라서 적갈색을 띠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여기가 어디인지, 강의 하상인지, 아니면 숲 속의 빈터인지도 알 수 없다."


<글 사진 : 이재형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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