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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이재형 작가,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연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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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8-15 06:14 조회 1,309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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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살아 있는 예술가들 


본지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이재형 작가의 프랑스 르퓌 산티아고 순례길 연재를 마치고, 

이재형 작가의 파리 저서, (<나는 왜 파리를 사랑하는가> 2022년 디이니셔티브 출판)를 연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신 이재형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파리의 공동묘지는 혐오시설이 아니다. 봄에는 온갖 종류의 꽃들이 피어나고 여름이면 키 큰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며 가을에는 알록달록 단풍이 지는 공원이다. 그래서 공동묘지에 가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거나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을 자주 볼 수 있다. 파리의 묘지는 흔히 "야외박물관"이라고 불린다. 우리가 잘 아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묻혀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무덤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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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르 라세즈 묘지

 연 방문객이 2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이 묘지는 파리에서 가장 넓고(44 ha), 프레데릭 쇼팽이나 에디트 피아프, 짐 모리슨, 오스카 와일드 등 우리가 잘 아는 유명인사들이 묻혀 있다. 1804년에 문을 연 이 묘지는 처음에는 파리 외곽 높은 언덕의 가난한 서민동네에 있다는 이유로 파리 시민들이 매장을 꺼려 겨우 13구의 무덤 밖에 없었지만, 1817년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몰리에르, 라퐁텐의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크게 늘어나 지금은 약 7만 구의 무덤이 있다.

 

 1. 에디트 피아프(1915-1963)

 가수이자 작사가인 에디트 피아프는 <장밋빛 인생>이라든가 <밀로르>, <군중>, <아니, 난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 같은 명곡을 탄생시킨 프랑스 대중음악계의 영원한 스타다. 1915년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부모들로부터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다. 유랑서커스단에서 일하는 아버지를 몇 년 동안 따라다니던 그녀는 열다섯 살 때 집을 떠나 처음에는 길거리에서 노래를 하다가 얼마 뒤부터는 대중무도회장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던 그녀는 1935년 결국 루이 르플레의 눈에 띠었고, "밤의 황제"라 불리던 이 카바레 운영자는 그녀를 카바레에 데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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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트 피아프의 무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보러 카바레로 밀려들었으며, 그녀의 노래를 듣고 열렬히 환호했다. "참새 피아프(Môme Piaf)"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팬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뮤직홀의 스타에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피아프의 삶은 온갖 크고 작은 비극으로 점철되었다. 특히 딸 마르셀이 1935년에 죽었고, 연인 마르셀 세르당이 1949년 비행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계속되는 불행으로 인한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 질병(그녀는 특히 다발관절염을 앓고 있었다),과음, 모르핀 중독… 에디트 피아프는 1963년 불과 마흔일곱의 나이에 동맥류파열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외친다.   "아네요! 절대 아네요! 아니라구요!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날 행복하게 했건, 아니면 힘들게 했건, 아무 상관없어요!" <난 후회하지 않아(Je ne regrette rien)>

 

 2. 짐 모리슨(1943-1971)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연출한 <지옥의 묵시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룹 도어즈의 <(The End)>으로 시작한다.

  “이게 끝이야, 아름다운 친구, 이게 끝이라구, 나의 유일한 친구 우리가 꾸민 세밀한 계획의 끝이야 서 있는 모든 것들의 끝, 끝 안전하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은 끝 난 다시는 네 눈을 보지 못할 거야 넌 어떻게 될지 알 수 있어? 절망의 땅에서 어떤 이방인의 손을 필요로 하는 정말 무한하고 한없이 자유로운 뭔가가 말야[]

 이 노래를 통해 제임스 모리슨은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는 것일까. 1971, 그룹 도어스의 보컬 짐 모리슨은 파리에 있는 자기 아파트 욕조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나이 27. <나의 불을 밝혀라> <태양을 기다리며> 등의 명곡을 발표하여 단숨에 스타덤에 오른 그는 단지 가수일 뿐만 아니라 60년대의 반전운동과 혁명을 상징하는 저항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와 시인 아르튀르 랭보, 극작가 앙토냉 아르토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이 신화적 인물은 시적인 가사와 파격적인 무대매너, 미스터리에 싸인 죽음으로 지금까지도 하나의 전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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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모리슨의 무덤 

  지난 2021 7월에는 전 세계의 팬들이 그의 사망50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무덤에 몰려들었다. 그와 그의 음악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부른 노래의 가사처럼 “폭풍 속을 달려가 는 라이더”였다.

 

 3.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오스카 와일드는 “삶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인물이다. 오스카 와일드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트리니티 칼리지와 옥스포드 대학을 나와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하는 탐미주의 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 극작가로 활동하며 <행복한 왕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등의 작품을 발표하여 영국최고 작가가 되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던 그는 알프레드 더글러스와 동성애에 빠져들면서 나락의 길을 걷게 된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된 더글러스의 아버지가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애자라고 쓰인 종이를 술집에 붙이고, 이에 격분한 오스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아버지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한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재판에서 2년 노역형을 선고받는 것으로도 모자라 더글라스의 아버지에게 재판 비용과 벌금으로 엄청나게 많은 빚을 지고 파산한다. 형을 다 살고 감옥에서 나온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세바스티안 멜모스라는 이름으로 살았고, 파리의 한 호텔방에서 뇌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처음에 파리 외곽의 바뉴 묘지에 묻혔다가1909년 페르라세즈 묘지로 이장되었고, 1950년에는 그의 첫 번째 동성애 상대이자 유언집행자였던 로버트 로스가 그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무게가 20톤이나 나가는 그의 묘비 한쪽 면은 날개 달린 스핑크스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스핑크스의 얼굴은 그의 것이다. 이 스핑크스상에는 원래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된 남자 성기가 달려 있어서 6년 동안이나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기도 했지만, 1961년 누군가에 의해 훼손되었다. 지금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은 유리벽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항상 루즈 자국으로 뒤덮여있고 꽃과 편지가 놓여 있다

4. 콜레트(1873-1954)

 영화 <콜레트>에서 더 이상 남편의 그늘에 갇혀 살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글을 쓰겠다며 망설이지 않고 집을 나서는 콜레트. 그녀는 죽음에 대해서도 이렇게 단호하고 당당하다.

  “나중에 일어나는 일은 짧은 환상에 불과하다. 나는 죽음에 관심이 없다. 나의 죽음에도 관심이 없다.

 작가 콜레트의 이 간결한 문장이야말로 그녀가 딸과 함께 잠들어 있는 그녀의 무덤이 왜 이렇게 간소한지를 설명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덤은 오직 검은색과 분홍색 화강암 석판으로만 이루어져있다. 그녀는 파리 시내에 있는 팔레르와얄 아파트에서 관절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교회는 그녀에게 종교 장례식을 치러주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는 그녀에게 국장을 치러줌으로써 그녀의 삶과 작품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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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트의 무덤

 

  5. 귀욤 아폴리네르(1880-1918), 마리 로랑생(1883-1956)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 사랑도 흘러간다 기억해야 할까나 아픔 뒤엔 늘 기쁨이 찾아왔었지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도 나는 늘 여기있네...

 입체파 화가들의 뮤즈였던 로랑생은 1907년 피카소의 소개로 아폴리네르를 만나 5년동안 열렬한 사랑을 나누었으나 결국 헤어졌고, 아폴리네르는 결별의 아픔을 우리가 잘 아는 이 명시에 녹여냈다.   “칼리그람”이라는 시각적 형태의 시를 만들어내기도 했던 아폴리네르는1차 세계대전에 참전 중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몸이 약해져 결국 스페인 감기로 숨을 거두었고, 그로부터 38년뒤에 세상을 떠난 로랑생은 다른 사람이랑 결혼했지만 평생 아폴리네르를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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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욤 아폴리네르의 무덤

그래서 그녀는 죽을 때 한손에는 아폴리네르의 시집을, 또 한손에는 장미를 들려서 흰색 드레스 차림으로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녀의 유언은 그대로 이행되었다. 이 두 연인은 100미터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묻혀 있다. 남녀의 사랑이란 이토록 모질고 징하다. 선돌 모양을 한 아폴리네르의 묘석은 아폴리네르의 친한 친구였던 피카소가 설계했고, 비용은 피카소가 마티스와 함께 그림을 경매에 부쳐 조달했다. 그리고 묘석에는 그의 시집 ≪칼리그람≫중이라는 시 일부(그의 죽음을 언급하는)와 심장모양을 한 칼리그람시(“뒤집혀진 불꽃과 흡사한 내 심장”)가 새겨져 있다.


<글 사진 이재형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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