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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여성 인권 신장 투쟁의 아이콘(Icône) 시몬 베이유(Simone Veil) 타계 (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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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24 01:23 조회 2,22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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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낙태 합법화 이끈 여성 정치인 -

지난 30일 프랑스 여성 정치인이자 국내 수감자들의 인권을 위해 앞장섰던 인권 법률가, 페미니스트로도 잘 알려진 시몬 베이유(Simone Veil)가 향년 89세로 타계했다. 그는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홀로코스트 (유대인 학살, génocide) 생존자로 알려졌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여갔다 살아 돌아온 뒤 초대 유럽연합의회 최초 선출직 의장을 지낸 입지전적인 여성.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여성 정치인으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인권 법률가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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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이유(Simone Veil)는 법관 출신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전 대통령 시절인 1974년 중도파 내각에서 보건장관으로 발탁됐다. 그는 5년간 보건장관으로 재직하면서, 여성의 인권 향상을 위해 누구보다도 투쟁적으로 앞장서 여성의 권익을 법적으로 쟁취한 인물이다. 카톨릭적 전통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그는 여권(女權) 신장을 위해 첫째, 여성들이 쉽게 피임약 구매할 수 있도록 했다. 두번째는, 1975년 낙태 합법화 법안을 통과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에 4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프랑스에선 이 법을 « 베이유 법 (Loi Veil) »으로 부른다.

당시 하원은 25시간의 격론 끝에 낙태 합법화 법안인 베이유법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반대하는 일부 동료 남성의원들은 낙태를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 비유하는 등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인 알랭 뒤아멜은 이날 RTL 방송에 출연해 « 낙태 합법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의원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서 있던 베이유 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 당시 남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돌이켜보면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 »고 회상했다.

1927년 프랑스 남부도시 니스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시몬 자곱(Simone Jacob,야곱)으로 자란 베이유는, 10대 청소년 시절인 1944년 가족이 모두 독일군에 체포돼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가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참상을 경험했다. 이 때 아버지와 오빠는 동유럽으로 보내진후 만나지 못했다. 시몬은 어머니, 큰언니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를 거쳤으며 어머니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직후 사망했다. 큰 언니도 살아서 풀려났으나 1950년대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가 수용소 책임자의 도움으로 자유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자서전 «  »은 지난 2007년 출간돼 프랑스에서 꾸준히 읽히는 스테디셀러가 됐다. 이 책은 유복하게 자라던 베이유가 프랑스의 나치 정권이었던 비시(Vichy) 정부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추방돼 겪은 고초와 수용소 관리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뒷얘기다. 그는2005 TV 인터뷰에서 «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미지, 그 냄새, 그 울음소리, 그 창피함, 그리고 화장터에서 나오는 연기로 뿌연 하늘의 기억에 쫓기고 있다 » 고 말했다.

시몬 베이유는 또한 1979년부터 3년 동안 유럽연합 의회 최초 선출직 의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생전에 여러 인터뷰를 통해 유년 시절 나치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경험으로 인해 유럽통합론자가 됐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초대 유럽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해 강력한 유럽연합((EU)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통합 노력에 힘썼다.

베이유는 2010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 종신 회원이 됐다. 당시 연설에서 그는 «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생각한다. 부모님은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신다 » 고 언급하기도 했다.

시몬 베이유 타계 소식에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은 잇따라 애도 성명을 내고 고인을 추모했다. 엠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 우리 모두에게 영감을 주는 최고의 위인이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프랑스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인물을 본다 »고 했다. 베이유를 내각에 발탁했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한 매우 특별한 여성이었다 »고 말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 고인은 찢긴 유럽으로 인해 고통받으신 분으로 정계 입문 뒤에는 유럽에서 평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데 힘썼다 » 며 베이유의 유럽통합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르몽드(lemonde)« 시몬 베이유,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의 자유를 말하다  (Simone Veil, la parole libre d’une femme dans un monde d’hommes)» 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를 실으며, 그를 «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여권 진보의 상징, 유럽 통합의 인물이었다 » 고 평가했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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