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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어두운 시대의 예술 (5), 조지 메릴롱의 "코소보 초상집의 철야"를 통해 본 이중의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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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22 09:16 조회 2,23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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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 1 29일 보도 사진가 조지 메릴롱 (Georges Mérillon)은 알바니아 청년 나시미 엘샤니 (Nasimi Elshani)의 장례식에서 "코소보 초상집의 철야"(Veillée funèbre au Kosovo)를 촬영했다. 열 명 남짓한 여성들이 방안에 모여 잠자듯 누워있는 엘샤니의 주위에 앉아 슬픔을 표하고 있으며, 화면 한 가운데 자리한 여인은 마치 아들을 잃은 어미의 고통을 대변하듯 울부짖고 있다. 가족의 품에서 이루어진 28세 청년의 장례를 촬영한 이 보도사진은,  16세기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카라바조'의 작품을 연상시킬 만큼 풍부한 색채와 음영의 대비로 회화적인 아름다움을 사진 속에 잘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으며 걸프전이 한창인 1991년에 월드 프레스 상을 받았다.

전쟁에 의한 죽음 앞에서 보여지는 비통함과 조형적 아름다움이 잘 표현된 이 이미지 속에서, 청년의 죽음과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은 서양 기독교 회화의 익숙한 주제인 '피에타'를 연상시킨다. Pieta,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 단어는 예수를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의 슬픔이 함축되어 있다.

코소보 전쟁의 참상을 알리는 보도 사진의 이 이미지는 대중의 감정에 호소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보다는 사진의 "조형성"만이 지나치게 집중되었고, 정보성, 즉 사건의 보도의 기능은 잃어버린 채, 심미적으로만 간주된다.

1389, 1차 코소보 전투에서 동방정교회(기독교의 한 교파)의 세르비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처참히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코소보에는 오스만 제국의 관리에 의하여 점진적으로 이슬람 교도 특히,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들의 유입이 늘어나게 되었다.

20세기 후반이 되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를 중심으로 한 극단적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인들을 쫓아내고 그곳을 세르비아인의 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착수한다. 그들은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들의 성지를 더럽힌다고 생각하며 당시 무장조차 하지 않은 채 저항하던 알바니아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사진 작가 메릴롱은 이 사진이 촬영된 날 아침, 세르비아 경찰의 총탄에 사망한 Brestovc 지역의 젊은이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사망자 중 한 명인 엘샤니의 집에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이슬람의 한 종파인 수니파의 전통 장례식 장면을 촬영하게 된 것이다

분명 메릴롱은 기독교인의 억압으로 사망한 이슬람교인의 장례식 장면을 사진에 담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이미지는 '코소보의 피에타 Pieta du Kosovo' 라는 기독교적 슬픔의 상징으로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게 된다

작가는 이 사진이 갖는 미학적 프레임에 의한 도상 해석은 결코 연출한 결과물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코소보 사태의 문맥에서 벗어난 해석이 가능한 이 사진은 그가 다른 각도로 촬영한 여러 사진중 하나 였으며 보도국에서의 논쟁 끝에 이 아름다운 사진이 선택되어 유통된 것이다

이러한 서구 문화 권력에 의해, 알바니아인들은 그들의 가족과 이웃이 학살되고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것도 모자라 궁극에는 죽음 이후까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억압당하였다

 

518 광주, 이중의 폭력 

코소보 전쟁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980 5월 대한민국 광주에서는, 신군부 독재에 저항하는 대학생들을 저지하기 위해 공수부 대원들이 전남대 교문을 막고 학생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러한 과격 진압 과정에서 그들은  시위 학생이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도 곤봉과 대검으로 무차별 폭력을 가하였으며, 이를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에게 집단 발포를 서슴치 않았다. 결국 이 사건으로 수많은 광주 시민이 사망자 및 행방불명자가 되었고 부상을 당했으나, 이미 언론을 장악한 신군부에 의해 대한민국 대부분의 언론은 이 사실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진실을 전하는 대신 오히려 광주 시민을 폭도와 간첩으로 몰아 갔으며 광주를 제외한 다른 도시의 시민들은 언론이 한 말을 그대로 믿었다. 심지어 일부 시민들은 아직까지도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해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1980 5 20일 전남 매일 신문 기자 일동-

 

얼마 전 전두환은 최근 출간한 회고록을 통해 5.18은 폭동이었고 시민들을 향한 발포 명령은 없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수많은 증거와 보도사진들이 당시의 참상 말해주는데, 그 모든것들은 남북의 진영논리로 왜곡된다. 그가 이렇게 터무니 없는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은 그의 근본 없는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세력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러한 비인륜적인 행태는 아직도 원통함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희생자의 남겨진 가족과 이를 목격한 광주 시민에게 그들의 아픔을 부정하는 또 다른 큰 상처를 남긴다

2000, 아프가니스탄 출신 프랑스 작가 파스칼 콩베르 Pascal Convert  대리석을 연상시키는 흰색 왁스를 이용하여 "코소보 초상집의 철야"를 재현했다. 그가 만든 커다란 벽에 사진 속 인물들이 볼륨감 있게 튀어 나온 고전적인 부조의 형식과 달리 표면에서 안으로 오목하게 파내는 심조로 표현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관람객의 시선의 위치에 따라 양각과 음각에 의해 형태가 달리 보이게 된다. 관람객들은 이 낯선 방식을 통해, 정형화 된 시선으로 바라보던 사진 속 인물들과 거리를 두게 되고, 슬픔에 가득 찬 그들의 표정과 벽을 관통하는 손 동작으로 느껴지는 비애와 애도의 제스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통곡의 벽과 같은 작품을 통해 작가는 서구의 시선으로 읽혀지고 해석되는 이슬람 전통 문화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대한 개선을 요구한다

사실 우리에게 소개된 코소보 전투에 대한 자료는 서방측 기록에 의존한 것이 더 많다. 즉 권력이 정한 프레임에 의해, 또는 목적에 의해 수 많은 역사적 자료와 정보들이 오용되는 것이다. 마치 전두환 신군부가 5.18을 북한 개입설과 함께 희생자를 폭도들로 몰아 세웠듯, 지금도 그들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북한 특수군에 의한 폭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이에 분노한 한 희생자의 어머니는 "내 아들을 대체 몇번을 죽이는 것이냐"며 울분을 토했다

정확한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왜곡된 역사는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될 것이다.

5.18을 직접 취재하며 경험 했다는 보수 언론인 조갑제는 이렇게 비평한다.

"... 반박되지 않은 거짓은 진실이 된다."

 

<파리광장 /김지현 july79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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