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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신인작가 소개 VI> 실내 건축가에서 가구 예술가로, 훈 모로(전 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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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22 08:30 조회 2,90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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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4일 파리 보아 갤러리에서 가구 예술가,  훈 모로 Hoon Moreau(전 훈)의 개인전 오프닝이 있었다, 비가 촉촉히 내리는 가운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들은 무척 고급스러웠다. 가는 테이블이 천연 바위덩이의 뽀족한 부분위에서 균형감을 유지하며 놓여져 있었고, 나무 결이 섬세하고 정교하게 살아있는 가구 겉면에는 용암이 분출하듯 강렬한 선들이 춤을 추고 있는듯했으며, 나무가 껍질을 터트리며 속살을 보여주는듯한 문양들은 마치 세월의 흔적 같은 자국을 남기고 있다. 또 버섯 모양의 작은 테이블들이 가진 곡선들은 현대적이면서 디자인적인 감각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작품들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고급스러운 간결함이라고 할수 있겠다. 보통 고급스러움에는 부담스러운 무게감이 느껴질법도 한데, 어떻게 이런 간결함을 줄수 있을까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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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 모로 (전 훈) 작가는 서울대 조소학과를 졸업하고 도불해서 카몽도 학교에서 실내건축과 환경 디자인 공부한 이후 프랑스 건축회사에서 일을 했다. 20년간, 빌모트 & 아소시에( Wilmotte & Associés) 건축사무소를 비롯해 프랑스 건축회사에서 팀장으로 여러나라의 박물관, 궁, 고급 호텔, 주택 등의 실내 건축, 가구 디자인의 기획했다.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업 시작한 것은 2년 정도 되었다. 신인작가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신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그리 적당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20년간 현장 경험의 영향이 지금의 그를 즉, 가구 예술가로 있게 했기 때문이다. 또 이미 프랑스 갤러리들의 초청으로 파리, 뉴욕, 런던, 룩셈부르그 등 아트 페어에 참가해 좋은 성과를 이루고, 2017년 파리에서의 첫 초대 개인전을 시작으로 9월, 10월 다음의 초대 개인전과 유럽 여러 전시들이 계획되어 있다. 


도불, 카몽도 실내건축-디자인 학교, 20년간 건축 회사 생활, 그리고 뒤늦게 가구 예술가로 도전한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조각을 전공했는데 왜 조각을 계속하지 않고 가구 예술을 했나요? 


-저는 프랑스에서 contemporary art furniture, 현대 예술가구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아티스트 디자이너라고 소개됩니다..

그런데 저는 조각을 하고 저의 조각 작품들에게 기능성을 주어 우리의 삶에 참여하게 한다고 해요. 제 작품들은 그들의 존재 자체와 기능성과의 디알로그, 즉 대화 가운데 있어요.

예술이라고 하면,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예술’을 말하는 글이 있어요. 신영복 교수 글 중... ‘담론’ (2015) “내가 징역살이에서 터득한 인간학이 있다면 모든 사람을 주인공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나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유심히 봅니다. 그 사람의 인생사를 경청하는 것을 최고의 ‘독서’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에 나누어서라도 가능하면 끝까지 다 듣습니다.(…) 유심히 주목하면 하찮은 삶도 멋진 예술이 됩니다.(…) 예술의 본령은 우리의 무심함을 깨우치는 것입니다.”(251~252쪽) 조각, 가구의 장르 구분은 저에겐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프랑스로 유학을 오게 된 계기는요?


-어렸을때 부터 저에게 조각가는 멋졌어요. 그런데 흙을 주무르고, 부치고 떼고… 나무를 쓰다듬으며, 깍고, 파는 등, 시각적으로 전달 할 수 있는 지적 나눔만큼 접촉에서 오는 촉각의 나눔도 저에겐 중요했어요. 이 나눔을 제 작품에 담을 수 있기 위해 삶에서 우리가 접하는 사물들 그리고, 삶의 공간을 공부하기로 했죠. 일상 생활과 밀접한 나만의 예술 세계를 찾고 싶었던거에요. 그래서 우선 나를 둘러 싼 삶의 환경, 나의 생활 주변을 설계하기로 하고 실내 건축과 환경 디자인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유학을 왔어요.

대학 마치고 유학 오기전 한국 인테리어 회사에 이년 남짓 다녔는데 그때 다니던 회사 사장님의 남편이 프랑스인이었어요. 그렇게 프랑스와 연결이 되었어요. 그리고 주워진 순간 순간 열심히 하다보니 카몽도 학교를 마치고 프랑스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어요.


20년을 프랑스 회사에서 실내건축과 디자인 기획을 하다가 왜 회사를 그만두고 예술가의 길을 가게 된건지요?


-전 제 지금의 나이가 너무 좋아요. 머리속에도 마음속에도 어느정도 여유로울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었어요. 죽을 병이 아닌 이상, 죽을 죄가 아닌 이상 그리 심각한 것은 없다고 항상 상대화 시킬 수 있는 너그로움도 생겼어요. 경제적으로도 욕심을 갖지 않으면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게 되었고요. 오랜 사회 생활을 해 오면서 시간을 조직적으로 이용하여 여러가지 일을 동시에 잘 해 나갈 수 있는 훈련도 잘 되어있어요.

요즘은 100세 인생이라고 하쟎아요? 난 인생의 반 밖에 안 왔으니 무언가 다시 시작하기엔 가장 좋은 시기라고 생각했어요.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소중히 관리하며 앞으로의 반 인생을 열정적으로 재미있게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이제 정말 해 볼만한 시기라고 결정했죠. 그래서 내가 전공한 조각과 회사에서 20년 동안 쌓아왔던 생활 공간에서의 디자인을 접목시켜서 내 작품을 하기 시작했던거예요.


쉽지 않은 도전 같아요. 고민도 많았을듯한데요


-사람들이 저한테 훌륭한 월급에 멋진 프로젝트에 무엇이 불만이어서 회사를 그만두었냐고 묻곤해요. 그럼, 매일 교통체증에 출근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아침마다 나의 얼굴에 미소를 짓게한다고 농담을 하죠. 또 다른 자유를 만끽하고 있어요. 


무릇 가구 예술이라고 하면 디자인과 예술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시대에 따라 유행의 흐름이 있다고 봐요,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몇 년전부터 빈티지 디자인 가구 이후 현대 예술 가구(Contemporary Art Furniture) 작품들이 점점 선보여지고 있어요. 


프랑스 실내 건축 회사에 들어가 일하는게 쉽지 않았을거 같아요.

-언어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더 큰 걸림돌이 있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앎, 지식 ? 언어, 문화, 경제, 정치, 역사, 과학, 예술 등 모든 것이 부족했어요.

지금도 이 걸림돌들을 계속 밟아 가고 있어요.

처음에는 말단사원부터 시작을 했었죠. 처음 현장 감리 책임자로 나갔을때 여기 사람말대로, “조그마한 동양 (중국) 여자애가” 라고 똑똑히 들리는 비웃음을 그냥 삼켜야할 때도 있었어요. 그 이후로 저는 항상 굽 높은 신발을 신고 다닌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작지 않아요. 하하하 그리고 실수도 무진장했어요. 그래서인지 실력을 점점 더 쌓을 수 있었어요.

크라이언트의 변덕에 차분함을 발휘하며, 설득해 가며, 미적 개념을 교육해야하기도 했고요, 사장에겐 비유도 맞출 줄 아는, 또 한편으로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그렇지만 내가 주인이 아니기에 바로 내자리인 단지 팀장으로 돌아오곤 했어요. 그런데 능력 없는 상사는 정말 괴로웠어요. 난 팀장으로서 팀원에겐 일의 순조로운 진행을 위해, 때로는 엄격하게 그러나 대부분은 다독임을 아끼지 않았어요.

전 크로키가, 디자인이, 설계가, 현장 일, 모든게 즐거웠어요. 

프랑스, 이태리, 스위스, 영국 등 유럽 프로제는 물론 그 더위에 온몸이 다 가려지는 긴 검은 옷과 머리를 다 감싸야 하는 검은 스카프를 착용 해야했던 사우디 아라비아 리야드에서의 프로젝트, 전쟁으로 무너진 흔적인지 건축 중인지 구분이 안가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프로젝트, 장인들과의 의사소통이 어려웠던 우크라이나 프로젝트 등, 모두 나에겐 점점 더 커다란 풍요로운 경험의 보따리를 꾸릴 수 있게 해 주었어요.

20년 넘게 이곳, 반은 내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프랑스에서, 아니 유럽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접하며 « 사회생활 »을 했어요. 항상 « “잘" 살아야지 » 하는 가치관을 지키려 노력했어요. 그렇지만 « “잘" 사는 거 »에 항상 의문을 던지기도 하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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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전공에 실내 건축, 디자인에, 많은 부분을 다룬거네요.


-저는 뎃생, 회화, 조각, 공예, 가구 등 쟝르에 경계를 두고 싶지 않아요. 회사에서 실내건축과 디자인을 할때 나무, 돌, 금속, 타일, 유리, 천, 설비, 전기, 조명, 조경, 음향, 장식… 각 분야의 엔지니어들, 장인들, 노동자들… 때로는 수 십명이 함께 회의를 해요. 전 정확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어 각 분야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을 미의 시각으로, 기능성을 우선으로, 뎃생을 무기로, 그때 그때 풀어주는 능력을 키워왔어요. 그래서인지 저에겐 장르를 구분하는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네요.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작업하고 싶어요.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리고 해석하는 등, 나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는거죠.


이번 보아 갤러리 개인전 제목이‘시간의 시각 (L'œil du temps)'이던데 작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건가요?


-저는 아름다운게 좋아요. 아름답고 싶고, 아름다운 시각을 가지고 싶고, 아름답게 보이도록 하는 마술사이고 싶어요. 항상 ‘미의 본질’은 뭘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선뜻 ‘예쁘다’ 하는 것이 정말 예쁜게 아닌 경우가 많았어요. 사람과의 관계도 많은 시간이 지나고 상대방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했을때 소중하고 멋지게 느껴졌거든요. 작품에서도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시간이 지나서 나무가 갈라지고 터지면서 안에 있는 소중한 것, 귀한 중심이 보이는거죠. 그리고 뿌리가 움직이면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이라든지, 화산의 용암을 표현한 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오는 자연의 현상이쟎아요.

 

그래서 이번 제 작품들은 아름다움의 본질, ‘’흐르는 시간의 시각’’으로 본 자연을 표현한거에요. 예를 들어 작품 “평형의 바위 Roche en équilibre” 같은 경우에는 바위가 바람과 파도에 깎여서 뾰족한 채로도 지탱하고 서 있는 놀라운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거에요. 흐르는 시간의 눈으로 본 자연은 항상 균형을 찾고 있어요. 인간의 삶도 그런것 처럼, 일상생활에서 나, 가정 그리고 일과의 균형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끊임없는 나 자신과의 협상속에 그 균형을 찾아가고 있을 때, 그리고 부부간의, 가족들간의, 친구들간의, 회사 동료간의 인간 관계에서 조화로운 균형를 찾았을 때 삶의 아름다움이 보여진다고 생각해요.     


회사에서는 디자인만 했고, 시공은 맡긴거네요. 20년 동안 디자인만 하다가 이제 작업을 하니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을것 같은데요


-그동안 손이 근질근질했죠, 그런데 그때는 회사의 경향과 크라이언트에 맞는 디자인을 했어요. 나의 영혼이 들어간, 나만의 디자인은 아니었어요. 나를 표현하는 많은 크로키들은 따로 간직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작업을 시작한 이후 계속 배우고 나만의 기술을 찾아가고 있어요.


“평형의 테이블” 같은 작품 보면 가는 테이블이 어떻게 뽀족한 모양의 바위 위에 버티고 있나 싶어요, 과학적인 테크닉을 요하는 작품 같아요.


-안에 금속 구조가 들어있어요. 상판을 많이 부셔 버렸죠. 상판과 밑 받침의 균형을 찾기위해 여러번 시도해 수십개 버리고 찾은거에요. “그림자 빛살” 같은 경우에도 실을 통과시키는 방법을 찾으려고 엮었다가 풀었다가를 수차례 했어요. 그것도 2년이란 시간이 걸렸어요. 제 작품들에 필요한 기술은 제가 20년동안 뛰어난 장인, 엔니지어들과 함께 일하면서 터득한 것들의 응용된 결과에요. 그것들이 나의 중요한 재산이 되어, 조각과 디자인 두가지를 겸비할수 있었어요.


아뜰리에는 어디에 있어요?


-부르곤느 Bourgogne 지방에 파리에서 차로 1시간 30분 정도 가야 해요. 10년간 비어있는 돌아가신 시할머니 댁을 제가 아뜰리에로 바꾸었어요. 저는 청소년 딸이 둘인데 저녁 10시에 딸들이 필요로 하는 엄마 역할을 다 끝내고 나면 아뜰리에로 가서 메일 확인하고 바로 자요. 그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 오후 5시까지 작업을 하고 다시 파리로 와요. 제 작업과 중요한 엄마 자리와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죠. 딸들과의 대화, 식사, 음악학교 픽업 등.. 그리고 밤 10시에 또 다시 아뜰리에 내려가는 생활을 거의 매일 같이 하고 있어요. 파리 근처로 아뜰리에를 옮길 수 있을떄까지는요


많이 힘들겠어요.

  

-너무 재미있어요. 예전에 회사에 소속되어 있을때에 비해서 많이 자유로운거에요. 회사 다닐때 한꺼번에 6, 7개의 프로젝트를 하곤했어요. 여행 가방을 정리할 필요도 없이, 출장 다녀오면 며칠 있다가 프로젝트 준비해서 바로 또 떠나고 할때가 많았어요. 일주일씩 집에 없기도 하고… 그러다가 지금은 딸들 스케쥴과 방학 등을 고려해 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날때마다 너무 행복한거에요. 일은 지금도 회사에 다닐때 만큼 하죠. 아니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밤새도록 작업에 대해 계속 생각을 해요. 그렇지만 나에 의해 결정할 수 있는 시간적인 자유로움은 어떤 것과도 바꿀수 없는 것 같아요.


회사에 다닐때부터 항상 언젠가는 작업을 할거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나요 ?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한번도 버린 적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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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을 보면요 아주 섬세한 것 같으면서도 대담한 것 같아요. 작가의 성정이 당연히 작품안에 녹아있을건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작품을 자세히 보면 굉장히 여성스러운데 언뜻 풍겨지는게 남성적이라고도 하더라고요. 글쎄요내 이름이 남자 이름이쟎아요? 태어날때 아버지가 당연히 아들일거라는 확신이 있으셔서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았는데 딸인거에요. 그래도 이름만은 안바꾸겠다고 하셨어요. 그런 영향일까요 ? 살아온 것을 보면 사소한 것에서 부터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항상 잘 알았어요. 그리고 그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고요. 그런 성향들이 어떤 대담함을 이끌어내지 않았나 싶어요. 


또 살면서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 포장된 내 모습이 아닌, 자신있게 « 나 자신 그대로가 되는 것 »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리고 « 나 자신으로 사는 것 »을 계속 훈련하고 있어요. « Etre sois même », 삶을 자신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좋은 훈련이 되어 주고 있죠. 그러다 보니 나를 끝없이 알아가고 있고요. 많은 사람들이 제 작품들에서 저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훈 모로 (전 훈) 작가와의 인터뷰 내내 그에게서 즐겁고 활기차게 삶을 엮어나가고자 하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풍겨졌다. 미술 비평가인 호리아 마루프 Horya Makhlouf는 그에 대해 “그는 자연이 이룩한 놀라운 업적들을 « 가구로 번역 »하려는 기발한 몽상가’라고 표현했다. 훈 모로( 전 훈)작가와 그의 작품을 한 문장으로 가장 잘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의 개인전은 파리 보아 갤러리에서 6월 2일까지 계속된다.                                      

       


작가홈페이지                                                                 



<파리광장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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