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안견, «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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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19 04:21 조회 1,710 댓글 0본문
- SBS 수목 드라마‘사임당 빛의 일기’속 명화의 허구 -
배우 이영애가 16세기 조선시대와 21세기를 오가며,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申師任堂·1504~1551)와 한국 미술사 강사, 1인 2역으로 등장해 화제를 뿌린 SBS인기 드라마‘사임당 빛의 일기’(극본 박은령 연출 윤상호, 1월 26일 첫 방송)에서 극중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 :‘안견의 금강산도’. 극중 이 그림은 진품 논란의 중심에 있으면서, 조선시대와 21세기를 교차하며 등장하는 주인공(이영애)을 연결 시키는 핵심 매개체다.
드라마 속‘안견(安堅)의 금강산도’는 허구 !
조선초기를 대표하는 거장 안견(安堅, 출생, 사망 미상)의 분명한 진적(眞的) 작품은 현재 «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 » 가 유일하다. « 몽유도원도 »는 동시에 조선초‘최고의 명화’로 인정받는다. 바꿔말하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안견의 금강산도’는 현존 작품도 없고, 이같은 그림을 그렸다는 기록도 전해지지 않는다.
« 몽유도원도 »는 1447년(세종 29년) 4월 20일 밤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李瑢, 1418∼1453)의 꿈을 듣고 3일 만에 완성한 그림으로 전해진다.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 화가인 안견에게 꿈에 본 정경, 즉 무릉도원을 그리게 했고, 조선 전기 회화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 몽유도원도 »는 이렇게 탄생한다.
« 몽유도원도 », 안견(安堅, 15세기), 14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 일본 덴리(天理, 천리)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 (감상 포인트) 안견 특유의 화면구성이나 공간처리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화면의 왼쪽 아래에서부터 오른쪽 위로 꿈속에 나타났던 장면이 점층구조로 전개되고 있는데 왼쪽에는 현실세계가, 중간에는 무릉도원(武陵桃源)으로 가는 동굴과 험난한 길이, 오른쪽에는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이 펼쳐져 있다. (줄거리) 안평대군은 어느날 꿈을 꾸었는데, 그와 가까웠던 박팽년과 함께 신비한 곳을 거닐게 됐다. 벼랑길과 시냇가를 몇굽이 돌아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복숭아꽃이 활짝 피고 대나무숲과 초가집이 있으며 시냇가에 조각배가 떠 있는 곳이었다. 안평대군은 박팽년에게 정말로 이곳이 도원이라고 말하고 문득 나타난 최항, 신숙주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함께 시를 짓고 놀다가 잠에서 깨었다는 것이 꿈의 줄거리다.
안견은 세종 연간(1418-1450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고 문종과 단종을 거쳐 세조 때까지도 화원으로 활약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당대에 가장 뛰어난 화가로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죽어서도 그를 따르는 화가가 많아서 조선 후기까지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많은 화가들이 안견의 그림을 교과서처럼 여겨 모사했다고 한다. 회화사에서는 안견과 그를 추종한 많은 화가들을 합쳐서 안견파라고 지칭한다. 이들의 영향은 일본의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수묵화 발전에도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안견의 « 몽유도원도 »는 조선시대 일본에 유출되어 현재 나라 덴리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현재는 중요문화재다.
금강산의 다양한 지형과 풍경을 그린 산수화 « 금강산도 »
반면,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그림 « 금강산도(金剛山圖)», 즉 그림의 소재로 금강산은 고려시대 말부터 화가들의 주요 관심 대상으로 종종 다뤄졌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궁중의 명에 따라 중국 황실이나 외국 사신들에게 주기 위해 금강산을 종종 그렸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성지로서 각광을 받았으며,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등이 방문하면 반드시 찾아보고 싶어했던 명산이었던 까닭이다.
« 금강산도 » 는 17세기 무렵부터 문인 화가들이 감상용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이후18세기 전반 겸재 정선(鄭敾,1676-1759)에 의해 집대성됐다. 겸재는 금강산을 여러 차례 답사하며 독자적인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 : 산천을 직접 답사하고 소재로 그린 산수화, 조선 후기 유행)법을 이뤘다. 실제 보고 느낀 것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보는 듯한 부감법(俯瞰法)을 이용해 전체적인 산의 모습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법은 이후 정선의 손자 정황, 심사정, 이인문, 김홍도, 김윤겸 등 많은 화가에게로 이어져 « 금강산도 »가 그려졌다.
겸재 정선의 « 금강산도 »
조선 후기에는 서민들의 « 금강산도 »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면서 민화와 목판화로도 제작되었다. 민화의 경우 특히, 신선사상 등의 민간신앙과 결부되면서 장식용 병풍으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어 수묵담채화 외에 유화로도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후 8·15광복, 6·25전쟁 등을 겪으며 국토의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이 되면서 부터는 고희동,박생광,김은호,변관식 등 근대 화가들의 작품 소재로 간간이 이용되었다.
< 파리광장 / 현 경, dongsimijs@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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