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파리에서 102세 생신 맞으신 한묵 화백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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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리광장편집부 작성일 23-01-02 09:50 조회 2,822 댓글 0본문
1세기를 넘게 살수 있다는건 어떤것일까 ? 사람의 삶과 죽음이 하늘 달려 있기에 100세 이상을 이땅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지인들에 둘러쌓여 지낼수 있다는건 축복일것이다.
4월 24일(2015년) 금요일, 파리에 있는 한국 식당, <한림>에서 한묵 화백님의 102세 생신 잔치가 있었다. 100세를 넘긴 102세다. 연락을 받고는 백수를 누리고 계신 분에게 가장 적당한 생신 선물은 무엇일지 잠시 고민을 했다. 초콜렛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은바 있다.
초콜렛을 준비할까 싶어 주저하다가 꽃이 가장 적당하겠다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꽂집에 들렀다. 연세에 맞게 은은한 분위기의 꽃다발을 준비할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사한 색깔들로 묶여진 꽃다발을 들고는 흡족해 하며 향했다.
날씨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그날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원로들 15여명이 함께 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모철민 대사 내외가 함께 해서 더욱 뜻깊었다. 원래 모철민 대사는 선약이 있어 꽃바구니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잠시 참석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사 내외가 도착하자, 한묵 화백의 부인인 이충석 여사는 식당 앞까지 나가 대사 내외와 반가움의 포옹을 한다. 문화원장으로 있다가, 대사로 임명받아 8년만에 다시 돌아온 파리에서 파리 한국 미술의 거장 한묵 화백의 102세 생신 잔치라, 청하고 응하는 쪽 모두 감회는 남달랐을것 같다. 모철민 대사는 한묵 화백에게 건강하시고 오래사시라며 축하 인사를 했다.
1914년생인 한묵 화백의 삶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서울 출생인 그는 20대를 만주에서 보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미술학교를 다녔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다. 이중섭이 마흔에 요절하자 슬픔에 겨워 비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그는 종군화가로 한국전쟁을 스케치했으며, 이후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유영국 박고석 황염수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긴 미술동인인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고, 조형요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를 우리 식으로 체화해 한국 모더니즘미술의 새 전기를 연 것이다.
1961년 안정된 미대 교수(홍익대)직을 버리고, 불쑥 파리로 건너갔다. 교수직에 안주했다간 그림다운 그림을 못그릴 듯해 내린 결단이었다.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의 선구자다운 선택이었다. 거의 맨주먹으로 고국을 떠나오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거리 청소부며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대작을 그리고 싶어도 집이 너무 좁아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으면 몇달, 몇년을 한 테마에 매달리며 작업을 풀어가곤 했다. 결혼도 환갑을 훌쩍 넘겨 했을 정도로 오로지 그림에만 푹 빠져 지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한국 화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평생을 회화 속 공간, 특히 1970년 이후부터 공간의 다이나미즘 시기에 4차원의 우주공간에 남아 젊은 마음으로 살아온 한 화백은 '한국 기하추상의 대부'로 불린다.
2000년 심장수술을 받은 이후 작품활동은 수월하지 않게 되었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간간히 작업을 해오고 있다.
헤럴드 경제와의 인터뷰에서,,,100세를 앞두고 화가로서 행복했느냐고 묻자 “나는 지금 죽음 가운데에 있고, 그러면서 살고 있는 것”이라며 “죽음이라는 건 누구나 예외없이 만나는 것이고, 그냥 때가 오면 간다고 생각한다. 심각할 게 없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열일곱 연하의 부인 이충석 여사는 “선생은 언제나 ‘붓대 들고, 씩 웃으며 가고 싶다’고 하신다”고 덧붙였다.
한묵 화백은 올해 2013년 5월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한불 문화교류협력에 기여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제12회 한불문화상의 수상한 바 있다.
<파리광장 편집부>
4월 24일(2015년) 금요일, 파리에 있는 한국 식당, <한림>에서 한묵 화백님의 102세 생신 잔치가 있었다. 100세를 넘긴 102세다. 연락을 받고는 백수를 누리고 계신 분에게 가장 적당한 생신 선물은 무엇일지 잠시 고민을 했다. 초콜렛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풍문으로 들은바 있다.
초콜렛을 준비할까 싶어 주저하다가 꽃이 가장 적당하겠다고 나름 결론을 내렸다.
꽂집에 들렀다. 연세에 맞게 은은한 분위기의 꽃다발을 준비할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화사한 색깔들로 묶여진 꽃다발을 들고는 흡족해 하며 향했다.
날씨는 더할나위 없이 좋았다.
그날 파리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원로들 15여명이 함께 했다.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부임한 모철민 대사 내외가 함께 해서 더욱 뜻깊었다. 원래 모철민 대사는 선약이 있어 꽃바구니만 전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잠시 참석하기로 했다고 한다.
대사 내외가 도착하자, 한묵 화백의 부인인 이충석 여사는 식당 앞까지 나가 대사 내외와 반가움의 포옹을 한다. 문화원장으로 있다가, 대사로 임명받아 8년만에 다시 돌아온 파리에서 파리 한국 미술의 거장 한묵 화백의 102세 생신 잔치라, 청하고 응하는 쪽 모두 감회는 남달랐을것 같다. 모철민 대사는 한묵 화백에게 건강하시고 오래사시라며 축하 인사를 했다.
1914년생인 한묵 화백의 삶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서울 출생인 그는 20대를 만주에서 보냈고,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가와바타미술학교를 다녔다. 귀국 후에는 이중섭과 가깝게 지냈다. 이중섭이 마흔에 요절하자 슬픔에 겨워 비문을 직접 쓰기도 했다.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온 그는 종군화가로 한국전쟁을 스케치했으며, 이후 서울에 터전을 잡았다. 유영국 박고석 황염수 등과 함께 한국 현대미술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긴 미술동인인 ‘모던아트협회’를 결성하고, 조형요소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서양의 모더니즘 미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되 이를 우리 식으로 체화해 한국 모더니즘미술의 새 전기를 연 것이다.
1961년 안정된 미대 교수(홍익대)직을 버리고, 불쑥 파리로 건너갔다. 교수직에 안주했다간 그림다운 그림을 못그릴 듯해 내린 결단이었다.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의 선구자다운 선택이었다. 거의 맨주먹으로 고국을 떠나오는 바람에 생계를 위해 거리 청소부며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림을 그렸다. 대작을 그리고 싶어도 집이 너무 좁아 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이곳저곳을 전전하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영감을 얻으면 몇달, 몇년을 한 테마에 매달리며 작업을 풀어가곤 했다. 결혼도 환갑을 훌쩍 넘겨 했을 정도로 오로지 그림에만 푹 빠져 지냈다.
19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한국 화단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평생을 회화 속 공간, 특히 1970년 이후부터 공간의 다이나미즘 시기에 4차원의 우주공간에 남아 젊은 마음으로 살아온 한 화백은 '한국 기하추상의 대부'로 불린다.
2000년 심장수술을 받은 이후 작품활동은 수월하지 않게 되었고, 2005년부터 지금까지 간간히 작업을 해오고 있다.
헤럴드 경제와의 인터뷰에서,,,100세를 앞두고 화가로서 행복했느냐고 묻자 “나는 지금 죽음 가운데에 있고, 그러면서 살고 있는 것”이라며 “죽음이라는 건 누구나 예외없이 만나는 것이고, 그냥 때가 오면 간다고 생각한다. 심각할 게 없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열일곱 연하의 부인 이충석 여사는 “선생은 언제나 ‘붓대 들고, 씩 웃으며 가고 싶다’고 하신다”고 덧붙였다.
한묵 화백은 올해 2013년 5월 주프랑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한불 문화교류협력에 기여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제12회 한불문화상의 수상한 바 있다.
<파리광장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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